<사진설명>오도재 정상에서 산상음악회가 열렸다.  높은 고산인 지리산과 덕유산을 둔 함양은 심산유곡이라 경치가 화려하고 맑은 공기와 물이 있어 심신을 수도하기 좋아 선비들의 발자취가 서려있는 곳이다. 또한 산이 깊어 피난민의 대피소이기도 하여 전해오는 이야기 가운데 유랑민들의 비극적 생활상을 희극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신재효(申在孝)가 쓴 판소리 `변강쇠가`에 나오는 내용 중 `변강쇠와 옹녀`가 지리산 등구 마천에 마지막 정착지로 살았다고 전해진다. 서도(西道)나 경기지방에 `변강쇠타령` 또는 `변강수타령`이 전하고 있는데 `변강쇠가`보다 단순한 내용이며 `변강쇠가`의 기원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변강쇠가는 천하잡놈인 강쇠가 남쪽지방에서 북쪽지방으로 올라오고. 팔자에 과부로 운명 지워졌기 때문에 마을에서 쫓겨난 옹녀는 북쪽에서 남쪽지방으로 내려간다. 두 사람은 개성으로 넘어오는 길목인 청석관에서 만나 즉시 부부로 결합한다. 변강쇠와 옹녀는 혼인 후에도 유랑을 계속한다. 옹녀는 생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데 반해. 강쇠는 도리어 온갖 못된 짓을 다 저지른다. 결국 이들은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지리산(등구 : 함양군 마천면)에 정착하게 된다. 그러나 나무하러 간 강쇠가 장승(벽송사절 : 함양군 마천면)을 패 와서 군불을 때고 자다가 장승 동토(動土 :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려 그것을 관장하는 지신의 노여움을 사서 받게되는 재앙)로 죽는다는 등구마천을 무대로 펼쳐지는 판소리라고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개방화 물결에 맞춰 각 지역마다 브랜드를 만들어 상품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각 지자체들은 `변강쇠와 옹녀`를 대상으로 한 상품을 개발하여 수익창출에 기여코자 앞다투어 나섰다. 남원지역에서는 `변강쇠가`의 판소리에 등재된 내용과 같다 하여 전북 남원시 산내면 백장암 계곡 입구에 거대한 파비와 `가루지기 타령`을 형상화한 쌈지공원(백장암공원)을 조성해 관광지로 조성했다. 이곳과 연계하여 민속주로 `강쇠주`를 만들어 판매하게 된다. 이에 함양에도 함양군 등구마천의 배경인 오도재 길 주변에 변강쇠와 옹녀 관련 시설과 오도재 정상 부근에 각종 조각품과 장성을 만들어 조각공원을 조성했다. 민속주로 `변강쇠술과 옹녀술`도 탄생했다. 힘을 자랑하는 조각은 관광자원화로 찬반의 여론이 있으나 시대가 브랜드화를 요구하니 볼거리로 구경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한편 선비의 고장이라고 알려진 함양은 선비들이 많은 일을 하였다. 그 중에 남계서원은 이곳 개암 강익 선생이 주축이 되어 군수 3명이 바뀌는 10여년 동안 유림들이 단합하여 완성했다. 남계서원은 대원군시절 미훼철 서원이며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99호이기도 하다. 이러한 선비들의 활동이 왕성하다보니 함양은 선비의 고장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시대가 변하여 좋은 아이템만 있으면 기업을 세우는 것이 오늘의 사회이다. 선비들의 후손도 민속주로 `솔송주`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요즈음 `변강쇠와 옹녀`와 관련한 관광객 유치를 위해 오도재를 지나 경치가 수려한 마천 지역에 유물관 시설을 한다고 한다. 선조들의 얼이 서린 오도재는 제한역이 있는 길. 어려운 세상 구양미(소금)를 지고 이고 넘나들던 길. 옛날 과거보려 지나던 길. 수많은 고달픈 애환이 서린 길이다. 제일문 정상의 주막집은 당집이 되고. 사라진 빈 대궐을 지나 지리산 가는 길은 변강쇠의 이야기 길로 점점 말려들고 있다. 제한역과 빈 대궐. 구양미를 지고 이고 나르던 유적지는 복원할 수 없는 것일까! 선비의 고장 함양의 이미지가 묻혀지지 않기를 바란다.  馬長鉉 유교신문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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