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제61주년 산청ㆍ함양사건 양민희생자 합동위령제 및 추모식이 11월3일 오전 경남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산청ㆍ함양사건 추모공원에서 열린 가운데 한 유족이 묘비에 엎드려 울먹이고 있다. 아픔의 역사. 함양 양민 학살 사건을 말한다 1. 잊혀지지 않는 그 날의 참혹함 2. 우리나라 민간인 학살의 역사 3. 진실과 화해를 위한 노력 4. 반복하지 않기 위한 우리가 할 일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어느덧 반세기를 훌쩍 넘겨 62년이 흘렀다. 당시 전쟁으로 수백만의 목숨이 산화하는 등 우리 민족 최대의 아픔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 중에는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조차 알지 못하면서 그 속에 숨 쉬고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총부리에 난자당한 이들이 있다. 깊은 산골 속에 살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순박한 농부였던 이들. 경찰의 호출에 아무 죄가 없다며 불려간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이같이 숨진 이들에 대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이라고 일컫는다.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가슴에 묻고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하소연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 정부의 사죄가 있었지만 한(恨) 많은 가슴속 응어리는 풀리지 않고 있다. 국가 권력은 한 생명을 앗아간 것에 그치지 않고 숨진 이의 자손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며 최근까지도 어둠속으로 몸을 웅크리게 했다. 소위 말하는 `빨갱이`로 치부하면서. 함양을 중심으로 산청·함양 사건과 거창 사건은 큰 주목을 받으며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과 각종 기념 사업들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들 사건은 한국전쟁이 진행되는 도중인 1951년 발생했지만 함양의 경우 전쟁 발발 전. 1949년도부터 자행돼 왔다. 군경에 의해 자행된. 국가 권력의 폭력에 의한 잔혹한 일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함양땅에서. 함양지역에서의 한국전쟁은 1948년 10월 여순사건 이후부터 1963년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이 붙잡힐 때까지 15년간 계속되어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전쟁을 치른 지역인 것이다. 2. 우리나라 민간인 학살의 역사 1945년 8월15일 광복의 기쁨도 잠시 분단이라는 비극이 우리 사회에 찾아왔다. 분단이 낳은 비극 중 가장 큰 것이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해 우리 민족 최대의 아픔이라는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전쟁은 군인들만을 대리로 내세워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가장 많은 피해를 보는 것은 민간인. 힘없는 민중들의 희생은 모든 전쟁에서 가장 많이 나타난다. 우리나라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해 광복 이후부터 전쟁이 끝난 이후까지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사상의 대립에서 오는 증오와 광기는 무차별적인 학살을 정당화 시켰으며 정부의 철저한 은폐 속에서 반세기가 넘는 동안 감춰졌다. 1990년 민주화의 열기 속에 학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후 2005년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시행되면서 은폐되고 조작됐던 진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학살을 크게 분류하면 한국전쟁 전후 양민과 보도연맹 등 민간인 학살. 미군에 의한 학살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렇게 숨진 이들이 100만명이 넘는다는 연구결과가 나올 정도다. 성공회대 김동춘(사회학) 교수는 저서 `전쟁과 사회`에서 "학살은 전쟁이 가져다 주는 비인간성과 비극성을 가장 잘 드러내 준다"며 "전쟁에서는 승리하는 자도 패배하는 자도 없다는 말이 학살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경우는 없다"고 했다. 군인보다 많은 민간인 사망자들 한국전쟁은 군인보다 월등히 많은 민간인이 학살된 비극적인 전쟁이었다. 아무런 법적 절차도 없이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힘없는 민간인들이 갖가지 이유 속에서 숨져갔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와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단체 등에 따르면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났을 때 최소 200만명의 희생됐는데 이들 중 반 이상은 민간인이었다.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대표적으로 1948년 4.3 제주 사건을 시작으로 여순사건. 지리산 일대 양민학살. 전쟁 중 양민학살. 보도연맹 사건. 형무소 사건. 미군에 의한 학살 등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한국전쟁 전 양민학살의 대표적인 것이 앞서 언급했던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이다. 여순사건의 여파로 전남과 전북지역의 수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됐으며 지리산 일대로 숨어든 빨치산들로 인해 앞서 언급했던 함양 도북 양민학살이 발생했으며 경북 문경에서도 수많은 양민들이 국군에 의해 희생됐다. 한국전쟁 중 발생한 사건으로는 거창사건과 산청·함양사건. 전남 함평과 전북 남원·순창 등지의 학살이 대표적이다. 거창사건과 산청·함양사건은 그 궤를 같이 한다. 1951년 2월 초순 11사단 9연대는 산청. 거창. 함양 등지에서 활동하는 빨치산을 인민군의 춘계공세 이전에 소탕한다는 목적으로 이른바 ‘견벽청야’ 작전에 나섰다. 말 그대로 ‘거점은 지키되 빨치산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은 없애 버려라’는 초토화 작전이었다. 이로 인해 51년 2월8일 산청군 금서면 가현마을에서는 토벌대가 마을을 포위하고 집집마다 사람과 가축을 모두 몰아낸 후 집에 불을 질렀다. 가죽과 베 등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따로 모은 군인들은 동네사람들을 모두 마을 앞 산신당 골짜기로 몰아넣은 후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당시 주민 123명이 즉사하고 6명만이 생존했다. 같은 만행은 이웃 방곡리. 점촌리. 자혜리. 화계리. 주상리에서도 반복됐다. 이 날 하루 동안 529명으로 추정되는 주민들이 학살됐다. 9연대는 2월10일 거창군 신원면에 출동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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