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한시백일장에서 한시 심사를 하고 있는 경재 선생(가운데 흰색 유복 입고 있다.)   지난 11월2일 함양의 마지막 유학자 경재 송경환 선생(1919.10.20∼2012. 10.19(94세))이 신선이 되었다. 몇 년 전 경재 선생이 살던 지곡면 상개평마을에 간 적이 있다. 이때 선생은 저에게 집터가 좋으냐고 농담하여 나는 앞산이 병풍같고 뒷산이 모은 터가 좋아 오래 사신다고 하니 흐뭇한 웃음꽃 피울 때가 엊그제 같다. 2010년 선생은 유림회관에서 어젯밤 집에 앉아 생각에 잠겨 시를 지었다고 읽어보라고 했다. 선생이 얼마 살지 않아 다시 시의 의미가 생각에 잠기게 한다. “荊渚騎牛老未成(형저기우노미성)/沼溪汎宅亦難行(소계범택역난행)/杜門閒坐滄桑裏(두문한좌창상리)/愁見方壺入戶靑(수견방호입호청). 마을에서 소를 타려니 늙어서 못타고/ 마음은 청춘인데 모든 게 할수없네. /문을 닫고 세상 변천 속에 한가로이 앉아/ 푸른 지리산을 보고 근심만 잠긴다”는 한시다. 선생은 수동면 가성마을에 있는 서당 학강선생에게서 사사했다. 슬하3남1여가 있다. 함양향교 고문인 선생은 함양향교 제13대 전교(1991-1993)를 역임했다. 전교 재임 시 한문으로 된 함양군지에 등재된 내역을 발췌하여 함양향교지를 한글로 해석하여 발행했다. 매년 함양향교 주관 한시 백일장에 시관(심사)으로 참석하여 대회를 원만하게 하기도 했다. 비문과 정각문 서문 등 글짓는 일은 도맡아 할 정도로 이름이 나있어 함양의 옥편이 다닌다고 할 정도로 문장력이 뛰어났다. 최근에는 춘계 하기연 선생 문집을 해석하여 발행했다. 선생에게 경재 송선생의 문집을 만들어 줄 것을 유림들이 요구하였으나 서거한 후에 돌아다니는 글을 모으면 될 것이 아니냐고 했다. 한문이 있는 곳은 선생의 해석문이 있다. 언제나 선생 옆에만 있으면 함양의 선비들이 움직이는 일거일동을 알 수 있다. 선생이 가시는 날 함양유림들이 선생이 사시던 지곡면 상개평마을 넓은 터에 12월4일 9시 노제를 지냈다. 이때 노제문(路祭文)을 되새겨 본다. “여산 송공 영구전에 감히 고하나이다! 아 슬프도다! 여산의 빛난 공훈. 운암 기옥옹의 불초 후예로서 선대의 가르침을 계승하였으며 일심으로 진실한 우리유도를 회복하려 했으며. 향교지를 주도하여 편찬한 공로가 있으며. 조석도 싫어함이 없으며. 존령 바라봄이 중하며. 유림 중에 원로로 선임되어 일이 있으면 상의하고 의심은 질의로 정하고. 아름다운 가르침은 일 처리가 공정했으니 오호 슬프도다! 지금 이미 진실한 언행 모습은 어느 곳에서 우러러 보리. 어떤 한 병이 몽매에 침입하여 약에 효험이 없이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시니. 천고에 남은 한이 눈물을 금치 못합니다. 우리 몇 유림인이 노제를 지내며 비박의 공을 삼가 드리오며 영구 앞에 응당 느낌이 있어 오직 존영에 엎드려 명복을 비옵니다” 이용근 짓고 양희용 읽어 마장현 기록을 남겼다. 경제 송선생 서거에 여러 선비들이 슬픔을 달래기 위해 만장(輓章)의 글을 남겼다. 그 중에 한 수를 소개한다. “於戱斯翁在(어희(오호)사옹재). 休休長者風(휴휴장자풍). 家庭常信睦(가정상신목). 隣里賴和融(인리뢰화융). 萬口仁聲飽(만구인성포). 一身德氣豊(일신덕기풍). 佳城何處卜(가성하처복). 故洞野山中(고동야산중). 오호 이 어른 생전에 계실 때/아름답고 기뿐일 덕망의 유풍으로/가정은 항상 신의가 돈독하고/이웃은 융화에 힘입었네/만인의 인성에 배불러/일신은 덕기가 풍후했네/무덤은 어느 곳에 정했는고/고향동천 야산 속이로세” 이용근 짓다. 함양의 많은 유학자들은 글을 남겼지만 모두 한문이라 오늘의 한글세대가 이해하기가 어렵다. 함양유림사 움직이는 옥편 경재 송선생이 신선이 되시니. 많은 후계 한학자가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마장현 유교신문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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