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죽은 대장금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세인에게 알려졌으며 최근에 방영이 끝난 드라마 신의에서도 공민왕이 즐겨 먹었던 것으로 나왔다. 쌀을 불려서 곱게 간 후에 우유를 넣어 끓인 타락죽은 조선의 왕가에서 병치레 후에 회복에 도움이 되게 하였으며 약을 오래 투여하여 입맛을 잃고 건강을 해칠 가능성이 있을 때 식치(食治)의 의미에서 보양식으로 먹었던 음식이다. 우리 민족이 우유를 먹은 것은 서구의 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는 4세기부터 왕실에서 먹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의 서울 대학로 인근인 낙산에 왕실 전용 목장이 있었고 생우유를 짜는 일은 내의원 의관들이 맡았었다하며 타락색(駝酪色)이라는 관청의 이야기가 조선 후기 관청의 업무를 적어 놓은 문헌으로 육전조례(六典條例)에 나온다. 낙산에 우유 조달청이 자리 잡은 것은 꽤 오래 전 일이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명종 때 우유를 조달하는 관청인 유우소(乳牛所)가 있다고 했고. 고려 우왕은 유우소를 지나다 수척해진 소를 보고 우유 진상을 금지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가 망한 후 조선이 들어서면서 세종 20년에 우유소를 타락색으로 명칭을 바꾼다. 그리고 그 위치를 현재의 낙산에 두었다. 날씨가 쌀쌀해지는 10월 상달부터 다음 해 2월까지 내의원에서는 임금님의 기가 허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타락죽을 처방했었다고 하며 ‘동의보감’에는 타락죽이 이유식. 보양식. 환자의 병인식으로 좋고 신장과 폐를 튼튼하게 하고 대장 운동을 도와주며 피부를 윤기 있고 부드럽게 해준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금이 병이 나면 궁중 내의원에서 끓여 올리거나 신하가 아플 때 왕의 명령으로 타락죽을 하사했다고 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인종 1년에 신하들이 “주상의 얼굴빛이 초췌하고 잠을 주무시지 못하며 심기가 답답하고 열이 나서 때때로 놀라고 두근거리신다고 하니. 다른 의약은 효험이 없고 타락은 조금 차서 심열을 제거할 수 있으니 타락을 드시라”고 청하는 장면이 있다. 조선 숙종 때 문인인 김창업(金昌業)이 사신으로 청나라를 다녀와서 쓴 연행일기(燕行日記)에는 조선의 사신들이 자금성에 도착해 황제의 알현을 기다리는 동안 타락차(駝酪茶)를 큰 병으로 하나 보내 왔으나 사신들이 마시려 하지 않았는데 나는 일찍이 그 맛이 좋음을 알았기 때문에 연거푸 두 잔이나 마셨다는 기록이 보인다. 조정의 높은 벼슬아치들 중에서도 우유 맛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우유 구하기가 힘드니까 그만큼 폐단도 컸는지 우유 진상을 중지하라는 기록도 자주 보인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46년에는 내의원에서 올리는 타락죽을 중지하고 어미 소와 송아지도 함께 놓아주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우유를 제 때 공급하지 못한 관리가 혼쭐이 나는 기록도 있다. 승정원일기에 고종 38년. 타락죽에 들어갈 우유를 진상하지 못한 담당 관리를 면직하고 관련자를 모두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에. 고종이 이번에는 특별히 용서한다는 사면조치가 보인다. 옛날과는 달리 우유가 흔한 시절이 되었다. 유난히 바쁜 날 아침. 옛 왕가의 우유 한 컵에 물 한 컵을 더하고 쌀가루 두 큰 술을 넣고 잘 섞은 후 부르르 끓여 잘 익은 깍두기 한 종이면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왕의 보양식을 먹은 것 같은 흐뭇함이 입 안에서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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