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과학의 달이고, 21일은 과학의 날이기도 하다. 지역의 특별한 과학행사가 없어 그냥 지나가지만 필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역사 속 과학자들이 4월과 인연을 맺고 있다. 지난 칼럼에서 소개한 레이첼 카슨 (4월 14일에 사망) 이외에도 아인슈타인은 4월18일, 찰스 다윈은 19일에 사망했고 양자역학의 탄생을 알렸던 막스 플랑크는 4월 23일에 태어났다. 이 세 과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역사상 길이 남을 위대한 과학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모두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아인슈타인은 당시 학생의 개성을 존중하지 않는 전체주의 식 교육에 저항하며 학교를 떠났다. 당시 교육환경은 현대의 우리나라 학교의 분위기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학교를 떠난 그는 독학으로 취리히 연방공과대학에 입학한 후 우여곡절을 거치며 특허국 서기 직을 얻었고 믿기 힘든 폭발적인 지성으로 1905년 한 해에만 5편의 혁명적인 논문을 발표하여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아인슈타인이 독일의 학교를 떠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의 존재를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진화론의 메커니즘을 제시함으로써 가장 중요한 생물학자가 된 다윈은 의사였던 아버지의 바람을 완전히 져버렸다. 의학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다윈은 의대에 입학하지만 18세에 학교를 떠나게 된다. 이에 대안으로 성공회 신부를 희망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케임브리지대 신학과에 입학하지만 신학공부보다 자신이 좋아했던 박물학, 지질학 공부를 하며 학교를 마쳤다. 이후 성직자 과정을 밟지 않고 비글호라는 탐험선을 타고 5년 간 세계일주를 하며 육지에 내릴 때마다 지질조사와 여러 화석들을 수집했다. 아마도 다윈은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아마존과 같은 세계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으며 그의 5년간의 항해 중 영국 학계에 새로운 정보를 우편으로 제공함으로써 이미 유명한 자연사학자로 변신하게 되었다. 22세의 청년 시절 과감히 탐사선에 올라 5년을 보낸 다윈의 결단이 그를 위대한 생물학자로 만든 것이다. 막스 플랑크는 1858년 태어나 만 16세에 뮌헨대학교 철학부에 입학한 후 열역학을 공부하기로 하였지만 지도교수였던 졸리는 이미 기본적 이론이 모두 완성되어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적극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는 졸리의 충고를 듣지 않고 헬름홀츠와 키르히호프와 같은 대 학자들에게 배운 후 「열역학 제2법칙에 관하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얻었다. 이후 베를린대의 교수가 된 이후 열역학과 전자기학과 관련된 최신의 내용들을 토대로 20세기의 첫 해인 1900년 인류 최초로 양자(quantum)역학의 기초적 내용을 제시했다. ‘플랑크 양자’라는 것이 그것이며 이는 5년 후 아인슈타인의 양자이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의 이름을 딴 ‘플랑크 상수’는 양자역학의 가장 중요한 보편상수이기도 하다. 그는 아인슈타인보다 4년 앞선 1918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플랑크 양자’를 발표할 당시 그의 나이는 만 42세였다. 보통 수학이나 과학계에서 30세를 넘기면 창의적이고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구상하기 어려운 것이 보통이다. 그 유명한 뉴턴의 운동법칙이나 만유인력법칙은 이미 20대 중반에 어느 정도 구체화되어 있었으며, 아인슈타인도 26세에 기적 같은 논문들을 쏟아냈다. 플랑크는 오직 자신만을 믿고 나이에 구애됨이 없이 목표한 바를 향해 열정을 바쳤으며 그 결과는 커다란 성공이었다. 이 위인들의 삶을 살펴보며 부모가 이끄는 대로 대학을 진학하고 삶을 선택하는 많은 한국의 학생들이 생각난다. 10살도 되기 전부터 조기학습전쟁에 뛰어들어 전혀 개성을 발휘할 수 없는 교육과정 속에서 허덕이며 학창시절을 보내는 우리 학생들 각각은 과연 무엇을 하고 싶을까? 아니 하고 싶은 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부모의 뜻대로 전공을 정하고 기계처럼 공부하는 학생들이 플랑크처럼 40대의 나이까지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이 땅의 부모들이여, 아이들의 삶은 아이들에게 맡기도 잘 갈 수 있도록 도와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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