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는 평화보다는 전쟁의 역사로, 그리고 피로 쓰여지고 채워진 부끄럽고도 가슴 아픈 비극의 역사이다. 전쟁은 평화를 사칭하지만, 그 내면 속에는 자신들의 욕망과 탐욕으로 시작된다. 초기전쟁은 부족이 한 부족을 침략하여 자신의 재산을 늘리고 노예를 많이 만들어 부를 축척하고자 강한 힘으로 힘없는 부족의 재산과 그 가족들을 노예로 삼았다. 이처럼 탐욕은 사람들과의 평화를 파괴하고 공동체를 깨뜨리는 죄악이지만, 놀랍게도 이성과 철학과 양심을 소유함으로 짐승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사람들이 탐욕의 노예가 되어 비이성적, 비철학적, 비양심적으로 살아간다. 세계사의 시작이 이렇게 시작되었고 진행 중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매달려 죽었지만, 다시 살아난 사건의 의미와 성과는 구약성경 출애굽(이집트)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좀 더 살펴본다면, 이집트의 바로 왕과 백성들은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아 자신들의 부를 축척하고 고대문명 도시를 건설해갔다. 이집트의 번영에는 이스라엘의 눈물과 고통과 희생이 있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자유가 없는 노예로 살았기에, 어서 빨리 이 고통스럽고 참담한 삶이 끝나고 새로운 자유의 날 곧 출애굽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이윽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 중심에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있었다. 전쟁과 분쟁과 다툼과 분열 중심에는 ‘탐욕’이 있었듯이 말이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 곧 심판을 넘긴 이스라엘 백성들은 피로 인해 자유를 얻게 되었고 자신의 자유를 빼앗고 종으로 부렸던 이집트 땅에서 400년 만에 나오는 기쁨을 누렸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억압과 착취와 고통에서 해방되어 참된 자유를 얻은 영광의 행진이었다. 노예에서 자유인의 신분이 된 사람의 행복하고 기쁨 넘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누구에게 더 이상 비굴하게 굴며 살아가는 종의 모습이 아니라 당당하게 살아갈 자유인의 모습으로 그들은 당당하게 자신을 노예로 착취하던 땅에서 찬양하며 나왔다. 개인적으로 북한 땅에도 일어나기를 기원한다. 다시 돌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으로 가면서 거룩한 백성으로 세움을 받았기에 더 이상 종의 모습이 아니라 당당한 주인공의 모습으로 가나안 땅으로 행진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가나안 땅의 죄인들은 탐욕으로 살아왔던 그들의 죄악이 심판받을 것을 알고 두려워하며 간담이 녹았다.
어제 4월21일은 예수가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죽으셨지만,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난 부활의 날이었다. 이 부활은 인류가 죄에게 종으로 팔려 탐욕 가운데 저지른 죄를 하나님의 어린양 곧 예수의 피로 하나님께로부터 용서함을 받은 날이며, 모든 죄악의 사슬이 끊어지고 해방된 영광스럽고 기쁘고 복된 날로 출애굽의 구원역사와 연결되어 있다. 이 둘의 구원은 1400년의 시간을 거슬러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신분이 바뀐 복음의 소식이다.
복음은 우리가 예수 안에서 죄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이제 자유인의 신분이 되었다는 기쁘고 복된 소식을 말한다. 우리 마음속에 고통을 주며 싸워야만 했던 탐욕과 탐심이 놀랍게도 예수 안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에 용서와 사랑이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채워져 부모와 자녀가 용서하고 사랑하며, 스승과 제자 그리고 미워하고 다투었던 모든 사람들이 화평을 누리는 꿈같은 이야기와 자신의 것을 내려놓고 이웃을 향하여 사랑을 실천했던 예수의 제자들의 삶이 신약성경 특히 사도행전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게 기록되어 인류 희망의 메시지라고 칭송을 받아왔다. 사람의 탐심을 이용해 돈이 최고의 가치인 냥 가르치는 자본주의가 아닌,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 자신의 부를 축척하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아닌, 오직 진리와 사랑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진정 예수로 인하여 자유인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세상 탐욕의 유혹 속에서 자유인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종으로 살 것인가?
이제 예수로 인하여 자유인이 되었으니 더 이상 죄에 종노릇하며 살아갈 수 없다. 이것이 우리의 선한 양심의 외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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