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후에 내가 이 공해를 물리칠 수 있는 심산(深山)에 약초 재배를, 아주 필요한 비밀 약초를 모두 키워가지고 오늘날에 이용하면 한국엔 지금 세계 사람이 와서 어느 집이고 와서 묵어야 될 형편인데 그러면 세계 돈이 우리 돈인데 광복 후에 나를 멀리하기 때문에 계룡산에 가서 함지배기(함지박) 판다, 뭐 나무장사를 한다 이러고 살았으니, 지금 지리산에 와 산지도 35년이야. 건 이승만이 때 내려와 가지고 은거했는데 거 왜 만고의 전무후무한 각자(覺者)라고 하는 사람이 지겔 지고, 5년이나 나무 지겔 지고 댕겨야 되느냐? 이거 참으로 운명이라. 누구를 탓할까?” 죽염 발명가이자 ‘지리산 도사’ ‘불세출의 신의(神醫)’로 불리며 수많은 암 난치병 환자들의 목숨을 구하고, 아들 윤세 씨(現 인산가 회장. 전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를 통해 함양을 죽염산업의 발상지로 만든 인산 김일훈 선생이 말년에 하신 말씀이다. 저 탄식 속에는 얼핏 일생을 ‘활인구세(活人救世)’ 정신 하나로 인고(忍苦)의 세월을 견딘 선생의 자조(自嘲)가 서글프게 깃들어 있다. 사람들은 각자(各自) 세속의 틀 속에 갇혀 지낸 탓에 곁에 있는 각자(覺者)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나마 아들 윤세 씨가 80년대 초 5년여에 걸쳐 주말마다 함양과 서울을 오가며 아버지이자 스승인 선생의 말씀을 구술로 받아 적어 펴낸 『神藥』 책 덕분에 비로소 선생의 ‘참 의학’ 사상이 세상의 알려지기 시작했다. 등잔 밑은 어두웠다. 서울에서 주목하기 시작한 독립운동과 병자 구제에 바친 선생의 파란만장한 생에 대한 경외감과 관심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작 선생의 거처가 있던 함양에서는 달 없는 칠선계곡 밤길만큼이나 캄캄했다. 그래도 함양에서 선생의 진면목을 알아보는 이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57년 여름, 남원 운봉에서 함양으로 간 선생은 당시 함양에서 명의로 이름난 정태진(鄭泰振) 씨의 정약국 사랑채와 하한조 씨의 백연리 산정(山亭)에서 두어 달씩 지냈다. 이때 함양읍에서 가깝게 지낸 인물로는 정약국 정태진 씨, 함양 양조장 대표 노영인 씨, 유림면장 허사원 씨, 함양군 교육감 정연섭 씨, 휴천양조장 대표 정낙현 씨 등이었다. 그해 겨울, 선생은 함양읍을 떠나 휴천면 행정리(살구쟁이) 삼봉산 골짜기 마을로 들어가 살면서 함지박을 깎아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 함지박 하나에 쌀 서 말 값을 받았는데, 이때 함지박을 지게에 지고 오도재를 넘어 마천 장터까지 70~80리 산길을 오가기도 하였다. 살구쟁이마을에서 30리 거리인 함양 장에도 내다 팔았다. 지금이야 자동차로 20분 안팎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지만, 인산 선생은 지난한 일생을 걸어온 것처럼, 마천 혹은 함양 장터를 오갔다. 1987년 8월 유림면 옥매리 1095-16번지에서 김윤세 회장에 의해 함양이 세계 최초 죽염제조 산업화의 현장이 된 지도 어언 30년이 지났다. 죽염산업의 태두(泰斗)가 된 김윤세 회장도 나무 지게 위에 함지박을 얹은 채 산길을 걸어가던 아버지 인산의 심정으로, 30년 동안 대를 이은 ‘참 의료’ 정신의 화두(話頭)를 걸머지고 길 없는 길을 만들며 걸어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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