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꾼들이 서식하는 지리구구라는 인터넷 사이트에 인기 연재되고 있는 꼭대 지종석 선생의 <엄천강 역사기행>에서 재밌는 글을 읽고 감회가 남달라서 소개 해본다. (지종석 선생은 서울 사람으로 지리산을 사랑하는 산꾼이자 재야 사학자다. 지리산에 관해서라면 지리산에 사는 사람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인데, 만일 대학에 지리산이라는 학과가 있다면 그가 쓴 지리산 연재물은 박사급 논문이 될 것이다. 꼭대는 선생의 호가 아니고 닉네임.)1500년대 사람 양대박이 천왕봉에 올랐다. 하산길에 용유담에서 엄천강을 따라 엄천사까지 걸어 당두재를 넘어갔는데, 용유담을 지나 엄천강변을 따라가며 본 풍경을 <두류산기행록>에 다음과 같이 남겼다. ‘여기서부터는 맑은 못이 협곡 곳곳에 있었는데 평평한 곳은 보면 매우 시퍼렇게 보였고 급류가 흐르는 곳은 흰 물결이 쏟아져 내렸다. 길이 매우 험준하여 구불구불 돌기도 하고 산세에 따라 언덕을 오르내리기도 하였다. 마치 잇몸처럼 오목볼록하게 생긴 기이한 바위가 여기저기 서 있는데, 몇 십리나 이어져 있었다. 이곳은 금강산 만폭동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양대박은 엄천강 비경을 금강산 만폭동에 비교했는데 지리산을 오르기 전에 금강산을 먼저 다녀와서 남긴 글이라고 하니, 엄천강변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어깨가 으쓱해진다. 지금은 큰 도로가 나면서 경관이 많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는 엄천골이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그나마 훼손이 덜된 마지막 비경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으로부터 600여년 전 이곳을 다녀간 사람의 글을 대하니 시대는 달라도 보는 눈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또 엄천강 하류 함허정에서 용유담까지 유람했던 1600년대 사람 박장원은 엄천골을 무릉도원에 비유하였다고 한다. 금강산 만폭동과 무릉도원에 비유된 엄천강변을 유람한 최초의 유산기는 1400년대 유학자 탁영 김일손이 남겼다. 김일손은 일두 정여창과 함께 용유담에서 엄천강변을 유람하고 <두류기행록>을 남겼다. ‘용유담을 경유하여 동쪽으로 나아갔는데 길이 매우 험하였다. 아래는 천자가 되는 절벽이어서, 떨어질 것만 같아 머리털이 쭈뼛거렸다. 사람과 말 모두 숨을 죽이고 지나간 것이 거의 30리였다. (중략) 산이 북쪽에서 뻗어 내리다 우뚝 솟아 세 봉우리가 된 곳이 있었다. 그 아래 경우 10여 호쯤 되는 민가가 있었는데, 탄촌(炭村)이라고 하였다. 그 앞에 큰 시내가 흐르고 있었다. 정백욱(정여창)이 “이 마을은 살만한 곳(可居洞)입니다.”라고 하니, 내(김일손)가 말하기를 “문필봉(=솔봉)이 앞에 있어 더욱 살 만한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20년 전 내가 가족 여행차 엄천강변을 지나가는데 경치가 어찌나 좋았던지 아예 눌러 앉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의 일치로 나는 김일손과 정여창이 사람이 살만한 곳이라고 한 마을에서 밥을 먹고 하루 잤는데, 그날 나는 내가 15년째 살고 있는 터를 구했다. 내가 정말로 살아보니 가히 사람이 살만한 곳이라, 시대는 달라도 보는 눈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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