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붙는다. 국보, 보물, 사적······. 그중에서 등록문화재라는 것도 있다. 근대문화유산 가운데 보존 및 활용 가치가 높은 것을 지정, 관리하는 것이다. 개화기부터 6·25전쟁 전후의 기간에 건설·제작·형성된 건조물·시설물·문학예술작품·생활문화자산·산업·과학·기술 분야·동산문화재·역사유적 등이 주 대상이다. 등록 기준은 근대사의 기념이 되거나 상징적 가치가 있는 것, 지역의 역사·문화적 배경이 되고 가치가 널리 알려진 것, 기술 발전이나 예술적 사조 등 그 시대를 반영하는 데 가치가 있는 것 등이다.함양읍(咸陽邑) 백연리(栢淵里) 함양국유림관리소에는 등록문화재 제37호가 있다. 산림보호와 관리에 사용되는 물품을 보관하고 목재 제품의 정보를 소개하는 산림정보관이 그곳이다. 일제시대에 지어졌으며 당시 함양 임업시험장 함양-하동지장이었다. 공기가 뺨을 아리게 하는 날 산림정보관을 찾았다. 문화재라는 푯말보다 ‘두루침자연관찰로’ 라는 푯말이 먼저 보였다. 두루침 숲으로 들어가는 곳에 서서 숲속을 보았다. 숲이라기보다는 작은 산책로였다. 겨울의 냉기를 품은 땅에 노란 열매가 여기, 저기 보였다. 모과였다. 하늘을 보니 나무 가지에는 아직도 노란 모과가 매달려 있었다. 한발 더 나아가니 키다리 나무들이 줄을 서서 숲을 이루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새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가지들이 ‘수수수 쏴아’ 소리를 내었다. 여러 가지 야생초도 심어져 있었다. 아, 이런 곳이 있었구나! 새삼 감탄이 흘러나왔다. 혼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나무줄기도 만져보고, 차가운 공기도 마셨다. 사람의 발길이 드문 곳이었다. 그만큼 고즈넉했다. 숲길을 벗어나 산림정보관으로 향했다. 산림정보관은 숲의 중앙에 있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교토대학 부속 연습림을 관리하는 사무실로 1917년 건립되었다. 광복 후 1993년까지 남부 영림서 함양관리소 사무실로 사용했다. 정면 5칸 측면 4칸에 두자 정도 높이의 기단 위에 직선적인 일본식 처마 선을 가진 팔작지붕으로 개량 일식 목조건축물이다. 정면 중앙에 있는 넓은 계단을 오르면 오목하게 들어간 현관이 있고, 기둥 형식과 처마를 받치는 공포 형식 등이 특이하다. 일본 근대건축 형성기에 정규 건축교육을 받지 않은 일본 민간 기술자가 나름대로 서양 건축양식과 일본 전통건축을 접목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양식을 갖추고 있어 학술적 연구대상으로 그 보존 가치가 높다고 한다. 역사의 유물 앞에 고양이 한 마리가 생을 마감했다. 불러도 움직임 없이 고요히 누워 있었다. 추위 속에서 마지막 디딘 곳이 이곳 이었구나! 너의 마지막을 목격한 것이 나였구나! 마음에 아리한 전율이 흘렀다. 건물과 고양이는 모두 ‘과거’라는 단어 속으로 함께 묻히고 있었다. 과거 속에는 항상 아픔이 있다. 아픔은 상처를 남긴다. 상처의 흔적, 우리는 그것을 흉터라 부른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건물도 사실 역사가 만든 흉터인 셈이다. 상처를 입은 피부는 튼튼해지기 위해 상처부위로 영양분을 더 많이 보낸다. 다시는 상처를 입지 않도록, 어떤 침입에도 아픔을 이겨낼 수 있도록 중무장을 한다. 그래서 주위의 피부보다 두껍고 단단해 진다. 흉터는 튼튼할수록 보기에 좋지는 않다. 비록 보기에 흉하지만 외부의 침입에 쉽게 정복당하지 않는 강함을 지닌다. 시대가 낳은 흉터 앞에서 삶을 생각한다. 누구나 아픔 없는 삶을 꿈꾼다. 하지만 삶을 튼튼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아픔이다. 아픔이 없다면 고통도 슬픔도 없다. 삶의 깊이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가끔은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이 든다. 그러할 때는 삶의 깊이를 모른 채 살아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냥 상처 없이, 아무 일 없이 살아가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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