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일은 한꺼번에 닥쳤다. 석의 머리가 아프기 전, 미자는 독사에 물렸다. 똥 무더기인줄 알고 발로 찬 것이 화근이었다. 몇날 며칠 열이 나고 다리가 부었다. 독에 효험이 있다는 약초를 써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목숨은 건졌지만 절름발이가 되었다. 주저리주저리 아저씨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아저씨는 미자 다리를 고쳐보려 돈을 훔쳐 서울로 달아났다. 절름발이가 되는 자식에 비하면 머리 아픈 것쯤 병도 아닐 것이라 여겼다. 자식을 향한 사랑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만들었던 것이다. 훔쳐 달아난 돈은 역전 야바위꾼에게 다 털려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찌어찌해서 쪽방에 자리를 잡아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하며 또 깊은 숨을 쉰다. 아저씨는 분하고 속상해서 술꾼이 되어버렸고, 미자가 남의집일을 다니며 아저씨를 먹여 살렸다. 그리고 며칠 전 잠을 다가 이승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나라로 가버렸다고 한다. 무슨 행복한 꿈을 꾸는지 얼굴에는 미소를 지으며 편안한 얼굴로 세상의 허물을 벗었다며 쓴 웃음을 짓는다.  회한에 젖은 이야기가 가슴을 저리게 만든다. ‘좀 잘살지.’ 입속으로 짠 것이 자꾸 흘러들어온다. 석은 명태껍질 같은 불을 쓰다듬는다. 아버지도 처음에는 화병이 나셨다. 내가 침술사가 되고 먹고 살만해지니 아저씨도 용서하게 되었다. 마지막 숨을 내려놓을 때는 절골을 떠올리며 그곳에 묻히고 싶다고 했다. 땅도 돈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마음은 가장 넉넉했었던 곳이다. 사람을 믿고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던 시절이었다. 형제 같았던 아저씨가 그렇게 떠나고 사람을 믿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부처님께 의지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버텼다고 했다. 아버지는 항상 입버릇처럼 중얼거렸다. “어느 날 부처님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어. ‘그래도 살아봐 좋은 날이 찾아올 거다’,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지. 그 부처님이 없었다면 나는 살지 못했을 게다.” 노랑나비가 팔랑팔랑 날갯짓을 하며 마애불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사람들은 대대리 마애불을 바라보며 ‘신체 비례라든가 윤곽선이 조화롭지 못하다’  말한다. 정말 못생긴 부처님이다. 하지만 석에게는 제일 아름다운 추억을 준 부처님이다. 돌이켜보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절을 올리고 마음을 씻으며 살던 그 시절이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아마 마애불을 조각한 장인도 그 마음이 아니었을까. 어색한 손놀림으로 오직 마음하나로 부처님을 조성했을 것이다. 정과 망치를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는 촌부였을지 모른다. 어딘가 어설프고 못생긴 부처님이지만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정성을 다 했을 것이다. 아픈 아들을 바라봐야 했던 아버지 같은 사람을 위해······. 신앙심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그것이 부처님이든 하나님이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실천하는 것이나 모두 같은 것일 게다. 여전히 노랑나비 한 마리가 주위를 맴돌며 날아다닌다. 그 모습이 자꾸 어린 미자를 생각나게 한다. 하르르 붉은 낙엽들이 떨어진다. 노란 낙엽들이 떨어진다. 가을이 벌써 끝자락에 있다. 이십년의 세월이 흐르고 우리는 모두 이곳에 다시 모였다. 아버지, 나, 그리고 아저씨와 미자······. 이곳에서 현세의 인연이 시작되었고 또 한 고비를 넘기며 인연은 바래져 간다.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이 흘러가다 태양을 가린다. 다시 흘러가다 또 태양을 가린다. 삶이라는 것도 구름처럼 흘러가다 멈추고 또 흘러가는 것인지 모른다. 아저씨가 가져온 막걸리를 종이컵에 따른다. 바람과 햇살과 간혹 지나가는 구름 그림자 속에서 막걸리를 나누어 마신다. 달짝지근하고 씁쓰레한 맛이 혀끝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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