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먼 산봉우리에 하얗게 내려앉았습니다. 길 가장자리에 우람하던 플라타너스는 시나브로 빛살조차 휘발해버린 나목(裸木)으로 겨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삶의 시간은 바람처럼 우리 곁을 소리 없이 흐르다가도, 가끔은 잎을 피워 꽃을 피우기도 하고 단풍처럼 서걱서걱 흔들리다가 일상처럼 떠나갑니다. 며칠 전에는 고향의 오랜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50대 중반의 친구들 얼굴에는 이미 땅거미가 내려 나목처럼 쓸쓸함이 배어납니다. 어릴 적 강변에서 함께 뛰놀던 푸릇푸릇한 생기는 어디로 갔을까요? 검불 같은 머리 위에 서리가 하얗게 내렸지만, 유년 시절의 추억담을 밤 깊도록 나누어도 풋풋하기만 합니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렀어도 순수하고 따뜻했던 그 시절이 앨범의 사진처럼 정겹고 그립습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모두들 바쁘고 가족 간에도 함께 하는 시간이 적습니다. 물질적인 삶은 풍요롭지만 행복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삶은 투쟁이라는 생각조차 들게 합니다. 사회 구성간의 믿음과 배려는 경시되어 서로간의 갈등과 질시가 사회악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현대사회가 다원화, 이질화될수록 상호 존중과 소통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지만, 우리 사회는 계층과 세대간 불신의 간극이 분열의 양상으로 증폭되고 있습니다. 빈부의 격차에 따른 이질감은 ‘박 기사’라는 유행어처럼 현대판 계급사회의 위화감으로 악화되고 있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는 자신의 노력에 따라 계층 이동과 순환이 원활해야 하는데,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는 가진 자와 가난한 자의 경계선이 견고해져 ‘빈익빈 부익부’의 대물림이 고착화 되었습니다. 또한 최근의 ‘갑을 관계’라는 신조어처럼 민주적인 계약 관계가 통용되지 않는, 권력과 부를 가진 자[갑]가 약자[을]의 인권을 무시하고 고압적인 권세를 누리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병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돈을 지불하여 ‘갑’의 위세를 부린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을 준 농부에게 감사하고 음식을 차려주신 음식점 아줌마에게 감사할 때, 진정으로 행복한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신뢰해주고 지지해주며 참으로 인격적인 만남과 소통이 이루어질 때 내 삶의 실존적 가치도 높아집니다. 겸손과 감사, 배려하고 신뢰하는 마음이 넘치는 사회야말로 행복한 사회입니다.  지금 지구상에는 하루에 2달러 미만의 생계비로 살아가는 사람이 지구상의 80%라고 합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4000달러이지만, 소득불평등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행복지수는 OECD 국가 중에 하위권(27위)이라고 합니다. 이는 삶의 질과 더불어 빈부격차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과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금권만능주의를 추종해온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유년시절을 동경합니다. 이웃 간에 정이 넘실대고 사람간의 믿음을 중시하던 그 시절이 훨씬 행복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빈부의 차이는 있다고 하지만, 모두들 옛날의 왕실보다 좋은 음식과 옷을 입으며 현대 과학의 문명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의 ‘산상교훈’은 우리 인간이 탐욕을 버리고 겸손하게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행복해질 수 있음을 일깨우는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참으로 보람되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겸손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이웃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 사회가 돈과 권력에 아부하는 풍토를 배격할 때, 우리는 비인간적인 ‘갑을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진실하고 선하며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존대하는 사회를 만들 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계층 간의 갈등이 치유되어 소통하고 신뢰하는, 활력 넘치는 사회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무엇이 되느냐”보다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라는 꿈 비전을 갖도록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보람되고 가치 있는, 행복한 삶의 비전을 우리 어른들이 열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인본주의가 꽃 피우는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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