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라고 생각했던 것은 안개가 아니었다. 머리의 두통이 사라지고 대신 눈앞에 안개 같은 것이 자리 잡았다. 사물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그나마 뿌옇게 앞이 보였다. 시력이 흐려진 것이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었다.“그래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 형님은?”“아버지는 오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유골을 이곳에 뿌려 달라 하셔서 그렇게 했어요. “이곳에 형님이 잠들어 있구먼.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노. 미안하다는 말밖에는.”“저는 침쟁이가 됐어요. 대구에서 ‘맹인 침쟁이’하면 알아주는 사람도 여럿 있어요.”“맹인?”“그렇게 됐어요.”“그때 내가 돈만 훔쳐가지 않았어도······.” 아저씨는 또 코를 훌쩍 거린다. 몰래 울음을 삼키는 모양이다. 두통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로 이사를 갔다. 다행히 약초를 사가던 약재상에서 아버지에게 일자리를 주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답답했지만 그냥 그렇게 살다보니 살아졌다. 친구가 없었던 나에게 약재상은 좋은 놀이터였다. 아버지와 같이 약초를 만지다보니 냄새만 맡아도 무슨 약초인지 알게 되었다. 신기한 것은 눈을 감고 사람의 몸을 만지면 경락과 세포들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사람의 오장육부가 훤히 보였다. 약재상 사장님도 신기해했다. 한번은 약재를 사러온 손님 몸을 만져보니 어딘가 아픈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나는 무심히 침놓을 자리를 중얼거렸다. 손님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큰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이젠 아픈 것도 지긋지긋하다. 까짓거 니가 한번 침을 놓아볼래?” 손님은 약재상 단골이 되었다. 내가 놓은 침을 맞고 몇 년을 속 썩이던 고질병이 나았던 것이다. 주위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하나둘 침을 맞으러 오는 손님들이 생겼다. 약재상 사장님은 장사가 잘되어 나를 더욱 아꼈다. 그리고 정식으로 침술에 관한 공부를 권했다. 그렇게 침쟁이로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세상에 인연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만남과 헤어짐에 고통이 따르는 것은 모두가 과거의 일이 원인이 되어 생겨나는 결과라고 했다. 세월이 지나고 돌이켜보니 아저씨가 돈을 훔쳐 달아난 것도, 내가 눈이 멀게 된 것도 다 원인이 있었기에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슬퍼할 일도 누구를 원망할 일도 아니었다. 선승(禪僧)은 말씀하셨다. “전생이 궁금하냐? 현생의 모습을 보거라. 미래생이 궁금하냐? 그럼 현생의 모습을 보거라. 현생은 전생에 의해 만들어졌고 미래생 또한 현재의 행동에 의해 만들어지느니라.”과거, 현재, 미래를 실타래처럼 풀어놓고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재에 받는 고통이 과거에 지은 업 때문이란 것을 안다면, 살아가는 지금이 조금은 덜 힘들지 모른다. 나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며 고마워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오래전 아픈 시간들이 없었다면 내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는 침쟁이가 될 수 있었을까. 아마 약초나 캐며 순박한 산골의 약초꾼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 삶도 행복했을지 모른다. 미자와 결혼도 하고······. “미자는 잘 살고 있죠?”“복 없는 년······.”아저씨는 하얀 보자기에 싼 옹기를 가리킨다. 긴 한숨소리가 허공을 가른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세상의 것들이 확연히 보일 때가 있다. 신기하게도 미자의 마지막 흔적이 훤하게 보인다. 어디서 날아왔을까. 노랑나비 한 마리가 그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가을에도 노랑나비가 날고 있구나. 팔랑팔랑 날갯짓을 하더니 또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아저씨의 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멍한 가슴을 후비며 파고든다. 담배 연기가 코끝에 맴돌고 짠 것이 입속으로 계속 흘러들어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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