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의면 대대리에는 거대한 자연석에 새겨진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경남 유형문화재 제333호이다. 높이 약 6m 정도에 이르는 대불(大佛)이지만 조각 수법이 매우 치졸하다. 뿐만 아니라 신체 비례라든가 윤곽선이 조화롭지 못하고 수인에 대한 이해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만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지방 장인이 조성했을 것이라 여긴다. 바위가 있는 주변을 ‘절골’이라 부르는데 지금도 청자 편과 와편이 발견되고 있다. 알려진 문헌 기록이 없어 옛 사지였던 것으로 추정 될 뿐이다. 해마다 찾아오는 곳인데도 매번 길을 헤맨다. 나쁜 시력 때문에 겪는 일이다. 그래도 고향이라 그런지 몸이 이끄는 데로 걷다보면 마애불이 보인다. 드디어 마애불이 있는 곳에 도착 한다. 아버지의 유해가 흩뿌려진 곳이다. 절골 어딘가에 아버지의 냄새가 감도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애불 앞에 누군가가 먼저 와 있다. 노인은 가져온 막걸리를 부처님 앞에 따르고 절을 올린다. 그러다 코를 훌쩍이기도 하고 손으로 눈가를 훔치기도 한다. 우는 듯 했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 알 수가 없다. 기도를 끝낸 노인이 먼저 말문을 연다.“여기도 많이 변했네요. 오래전에 이곳에서 살았지요.”“네? 저도 이곳에서······.”노인도 나도 깜짝 놀란다. 이곳은 마을과 떨어진 산속이라 딱 두 집이 있었다. 노인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2급 시각장애인인 나의 시야에는 얼굴 윤곽만 희미하게 보일뿐이다. “혹시 석?”“네, 누구신지?”“아이구, 나 미자 애비네.” 노인은 나의 손을 덥석 잡는다. 삼베같이 거친 손이지만 따스한 온기가 있다. 미자, 미자라는 말에 이십년 세월의 간격이 한순간 허물어진다. 그리고는 두 채의 키 낮은 지붕이 환영처럼 다가선다. 오래전 나와 아버지가, 미자와 아저씨가 살았던 집이다. 미자와 나는 같은 또래였다. 우리는 산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도라지꽃이 친구였고 나무와 산새가 친구였다. 어느 날부터 석의 머릿속으로 스멀스멀 두통이 찾아왔다. 가시달린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눈도 터져버릴 듯 아팠다. “조금만 참아. 아버지가 곧 병원에 데려가 줄게. 먼저 부처님에게 두통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기도부터 하자.” 아버지의 기도에는 긴 한숨이 섞여있었다. 또 미자 아버지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산골에 살면 딱히 돈이 필요 없었다. 다랭이 밭에 농사도 짓고 약초도 캐다 읍내에 팔면 먹고사는 것은 걱정 없었다. 석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두통에 좋은 약초를 이것저것 달여 먹었다.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읍내 병원에 갔더니 빨리 도시의 큰 병원으로 가라고만 했다. 아버지는 다랭이 밭을 팔아 돈을 만들었다. 며칠 후 깊은 밤 아저씨는 도둑고양이처럼 고향을 떠났다. 아버지가 마련한 돈을 모두 갖고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우리의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였다. 돈도, 돈을 만들 수 있는 땅도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약초를 달여 마시고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기도에 의지한지 여러 달이 지났다. 아버지의 지극한 마음이 부처님을 움직였던 것일까.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니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그날은 하얀 안개가 온 방안을, 마당을, 숲속을 덮고 있었다. 안개 때문에 가까이 있는 아빠 얼굴의 이목구비는 뭉개지고 윤곽만 보일뿐이었다. 두통이 사라졌다는 말에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곧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안개라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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