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험대장 문쌤: 고려가 문벌귀족사회에 접어들면서 십팔(十八)... 탐험학생: 쌤님, 점잖으신 분이 씨팔이라니요. 이거 곤란하십니다. 탐험대장: 말은 끝까지 듣고 새겨야 하느니라. 십팔자위왕설(十八子爲王設)이 저작거리에 난무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십팔자(十八子)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된다는 말씀(說)이다. 즉 이 십팔자를 합쳐보면 안다. 十 + 八 + 子 = 李다. 이씨(李氏) 성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된다는 말이다. 말이 씨가 되어 전국 방방곳곳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예외 없이 수런수런수런 입방아가 돌아가고 있었다.  잠시 고려의 연표(年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중부, 이의방이 일으킨 무신정변(1170년)을 기준으로 고려 전기와 후기로 가름하고 고려전기는 다시 태조 왕건에서 6대 성종까지 하여 고려초기, 그 이후 문벌귀족시대에서 무신정변까지 고려중기로 가름한다. 무신정변기, 원 간섭기를 지나 공민왕부터 고려 멸망 공양왕까지를 고려 말기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라의 체제를 정립한 성종을 지나 거란의 침입을 거친 후 고려 중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무신정변까지 평화시대를 구가하는 문벌귀족시대가 100여 년간 전개된다. 문벌은 오늘날 재벌과 같이 한 가문이 다른 한 가문과 결혼 연대함으로서 문어발식의 막강한 카르텔과 같은 권력을 차지하는 것을 뜻한다. 문벌귀족은 고려 중기 11C 개국공신, 왕족, 지방호족, 고급관리인 귀족들에게 주는 토지 공음전을 받고 5품 이상의 관리 자녀에게는 과거를 치르지 않고도 벼슬을 할 수 있는 음서(蔭敍)라는 귀족사회의 특권을 바탕으로 문벌끼리 결혼하여 경제적 기반과 권력을 거저 거머쥐고 있었다. 오늘날 삼성, 현대, SK, 롯데그룹 같이 유명한 8대 문벌 가문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문벌로서 이자겸의 경원 이씨, 김부식의 경주 김씨, 최충의 해주 최씨, 윤관의 파평 윤씨 등 거두의 가문들이 고려사회를 지배하고 콩이면 콩 팥이면 팥을 마음대로 심고 거두며 호가호위(狐假虎威) 왕을 능가하고 있었다. 경원(=인주) 이씨 이자연은 세 딸을 문종의 비로 주고 장인이 되어 권세를 누린다. 손자 이자겸 또한 세 딸을 예종, 인종에게 왕비로 등극시키면서 난공불락의 권좌에 오른다. 인종의 왕비가 된 이자겸의 셋째 딸 넷째 딸은 인종에게 있어서 이모였으니 근친결혼의 왕실실태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자겸의 권세는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 심지어 인종마저 외할아버지이며 장인인 그를 무서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자겸은 실제로 사돈 척준경 장군을 개경에 불러 들여 무력을 내세우며 왕위를 노렸다. 왕씨가 망하고 십팔자 성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되어 새 임금이 되고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 나라가 크게 부강한다는 예언 도참설(圖讖說)이 백성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이자겸과 척준경은 이자겸의 난을 일으켜(1126년) 궁궐을 불태우고 왕위 찬탈에 성공하는 듯 했다. 인종은 은밀히 척준경과 담판하여 반역이냐 제2의 실력자냐를 놓고 선택하라고 하며 이자겸을 제거토록 꼬셨다. 반역까지는 생각지 않았던 척준경이 이자겸을 잡아 인종에게 인계함으로서 인종은 이자겸을 전라도 영광으로 귀양 보냈다, 영광으로 유배된 이자겸은 영광 법성포의 특산물인 건조한 참조기 맛에 반해 이를 인종에게 진상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 건조 참조기에 굴비(掘非)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 식탁에 오르는 바로 그 굴비이다. 이자겸이 이 건조 조기에 굴비(掘非)라는 이름을 지은 것은 비록 귀양살이를 하고 있지만 절대로 굴복하거나 비굴하게 꺾이지는 않겠다는 숨은 뜻이 들어 있다고 한다. 이후 척준경 또한 정지상과 김부식에 의해 제거됨으로서 이씨가 왕이 된다는말을 믿고 설쳤던 이자겸의 난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렇다면 이씨가 왕이 된다던 십팔자위왕설인 예언의 도참설은 틀렸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기가 막히게 맞은 예언이었다. 정말 십팔자 이씨가 왕이 되었다. 그 이씨는 이자겸이 아니라 200여년 뒤에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를 예언하고 있었던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왕은 인간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정한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왕을 천자(天子)라고 일컫는다. 문벌귀족시대의 정점을 이루었던 이자겸의 뒤를 이어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또 하나의 엄청난 난이 일어나니 그것이 바로 일천년 이래 최대의 사건 묘청의 난이다.(1135년) 개경의 지력이 다 끝났으니 서경(평양)으로 수도를 옮겨 금국을 정벌하는 새 역사를 창조하자고 외쳤다. 태조 왕건이 이룩하려던 북진정책을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파 진압군이 서경파를 제거함으로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무위로 끝나고 만다. 만약 묘청의 말대로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고 북진정책을 펴 금나라를 정벌하였더라면 우리 겨레가 또 한번 만주를 지배하는 대국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를 역사의 갈림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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