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3년. .... 서희: 유단잔가? 소손녕: 그렇다. 서희: 그럼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천천히 느리게 한번 들어와 봐라. 소손녕: 고려는 옛 신라 땅에서 나라를 세웠고,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 거란의 소유인데 고려가 차지하였다. 또 고려는 우리 거란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도 송나라를 섬기고 우리 거란은 왜 섬기지 않는가? 어디 한번 코피 터지게 맞아 보겠는가? 서희: 소손녕. 너 참 무지하게 무식하구나. 우리 고려는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의 후예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고려라고 하였다. 고등학교 때 한국사도 안 배웠냐? 오히려 너네가 살고 있는 만주 땅이 우리 국경 안에 있다. 만주 전체가 우리 증조부님 광개토대왕님이 살던 곳이었고 발해 대조영 할아버지가 동경 상경 중경을 이리저리 산책하며 다니셨던 땅이다. 압록강 근처도 우리 땅인데 현재 여진이 차지하여 얼쩡거리고 길을 막아 너네 거란과 국교를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알라. 만약 너네가 여진을 쫒아 내주고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놓아 준다면 우리가 어찌 너희와 국교를 트고 맞먹지 않겠는가? 끝. 소손녕: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냐? 여진족을 쫒아주고 강동6주(흥화·용주·통주·철주·구주·곽주)를 주면 우리랑 친하게 지낼 거냐?서희: 그걸 말이라고 씨부리냐? 끝. 이렇게 해서 고려는 거란의 1차 침입(993년)을 세치 혀 말 세 마디로 물리치고 공짜로 강동6주를 획득했다. 서희의 뛰어난 외교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커녕 손 안대고 코풀고, 도랑 치고 가재잡고 금가락지 줍고, 꿩 먹고 알 먹고 백숙까지 먹었다. 훗날 세계는 서희의 외교담판을 뛰어난 명 외교의 사례로 뽑고 롤 모델로 공부를 하였는데 서희가 그냥 말장난을 하여 외교승리를 얻은 게 아니다 라는 것이다. 서희의 외교담판 승리는 우선 아시아 정세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피지기백전백승(知彼知己百戰百勝)이다. 거란은 고려를 쳐들어오기에는 뒤가 켕긴다. 고려와 전쟁을 하면 중국 본토와 대치하고 있는 송나라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해 올 것이 뻔하기 때문에 전후방 양쪽에서 싸우는 전쟁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고려에게 겁주는 정도가 그들의 전술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즉 거란은 송을 제압하기 위해 고려와 송의 관계를 단절시킬 목적으로 고려를 침입한 것이다. 이를 알고 있는 서희는 명분은 거란에 주되 실리를 얻는 방식으로 협상을 진행시킨 것이다. 북방정책을 꾸준히 추진한다는 국가 비전을 갖고 있던 비전에 따라 상당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힘을 바탕으로 물러서지 않고 거란군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음을 은근히 나타냄으로서 힘의 외교를 병행함으로서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사실에 바탕을 둔 서희의 역사적 정체성과 논리성이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고, 땅의 경계를 원래대로 하자면 요동은 모두 고려의 영토이다. 압록강 주변의 땅도 우리 땅이지만 여진이 도둑질해서 점거하고 있다. 논리대로 따지자면 너희도 우리 땅을 불법적으로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너희 나라(거란)로 조공하러 가지 못 하는 것도 여진 때문이라고 슬며시 제3자를 끌어 들인다. 강동6주를 획득한 뒤로도 고려는 거란에게 조공을 하러 가지 않았다. 고려에게 속았다고 생각한 거란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2차 침입(1010년)을 했고 양규장군의 활약으로 막아내었다. 속은 것을 안 거란은 뒤늦게 강동6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다시 3차 침입(1018년)을 했지만 귀주에서 강감찬 장군의 지략으로 거란군은 전멸됨으로서 거란은 쪽박을 찼다. 이후 고려는 북방민족의 침입을 대비해 압록강에서 동해안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과 개경에 나성을 축조하였고 거란은 고려를 치느라 진이 빠져 자멸하고 마는 웃지 못할 일이 생겼다. 고려의 대외관계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여진이라는 나라다. 옛날 초기군장국가 시대부터 말갈족으로 만주 북동쪽에 살던 부족이 끈질기게 이어와 고려의 함경도 지대를 얼쩡거리며 변방 마을을 노략질하며 성가시게 하고 있었다. 이에 윤관은 여진을 어루만지고 오라고 분부를 받잡고 깔보고 덤벼들었다가 엄청 얻어터지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말 타고 도적질하는 기마병 도적떼를 걸어 다니는 병졸 몇 백명이 어찌 평정하겠는가. 이에 윤관은 별무반(신기군-기병, 신보군-보병, 항마군-승병)을 편성해 다시 출정해 여진을 복속시켰다. 그리고 동북9성을 지어 관리체제로 들어갔다, 그러나 동북9성 관리비가 만만치 않았다. 농사가 힘든 함경도 지방에서 병사를 먹여 살리며 지키는 게 장난이 아님을 안 윤관은 수성을 포기하고 여진족에게 노략질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9성을 돌려주고 돌아왔다. 윤관은 귀족들의 비난으로 삭탈관직 당했다. 이처럼 국경을 지킨다는 것은 어려웠다. 이 여진이 나중에는 금을 건국하여(1115년) 고려에게 사대(事大)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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