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 우리지역에서 동방5현 중 한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을 모신 남계서원. 남계서원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유서 깊은 곳으로 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에도 살아남았을 만큼 긴 세월을 자랑한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서원의 가치는 이제 단순 교육기관을 넘어 분명 그 역사적 과정과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는 차원에서 세계인들과 함께 공유해야 하는 문화자산임에 틀림없다. 최근 남계서원을 비롯해 우리나라 9개 서원을 대상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남계서원과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 경주의 옥산서원,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대구 달성의 도동서원,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 전북 정읍의 무성서원, 충남 논산의 돈암서원 등이 그곳이다. 오는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다면 남계서원 등 9개의 서원은 우리의 문화자산을 넘어 ‘전 세계 인류의 공동유산’으로 인정받게 된다. 1회 서원의 중심 남계서원, 그리고 세계문화유산2회 한국의 서원①(소수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3회 한국의 서원②(옥산서원, 도동서원)4회 한국의 서원③(필암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5회 남계서원, 세계문화유산이 되려면 기호사림의 정신적 태두 충남 논산의 돈암서원고고한 선비정신을 품은 무성서원과 필암서원  충남 논산시 돈암서원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기호유학의 대표격인 돈암서원(遯巖書院). 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 예학의 산실이 되었던 돈암서원은 김장생 선생 사후인 1634년(인조 12)에 그의 제자들과 유림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돈암서원은 현재 논산시 연산면 임리에 들어서 있지만 처음에는 현재의 자리에서 서북쪽 1.5km 떨어진 숲말(林里)에 건립되었다. 숲말 인근에는 ‘돈암’이 자리하고 있다. 현종 원년인 1660년 사액을 받은 돈암서원은 숲말의 지대가 낮아 잦은 홍수피해가 발생하자 1880년(고종 17)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돈암서원의 주요 건물배치는 입구에 하마비와 홍살문이 세워져 있으며 산앙루를 지나 외삼문, 유생들이 공부하던 응도당, 2기의 서원비, 양성당, 내삼문과 사우 등 전형적인 서원 배치를 따랐다. 이 외에도 김장생의 부친인 김계휘가 후학을 가르치던 건물인 정회당,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정의재, 목판 등이 보존되어있는 장판각, 서원의 일을 맡아보던 전사청 등이 자리 잡았다. 돈암서원의 건물배치와 규모는 김장생이 죽림서원을 창건했던 규례를 이어 받았다고 전해진다. 돈암서원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홍살문과 하마비를 지나야 한다. 당시 도로 위치 때문인지 서원 건물의 오른편에 위치해 있다. 홍살문을 지나 건물 벽을 따라 걸으면 사계 선생의 도덕을 상징하여 만든 누각 산앙루(山仰樓)가 보인다. 산앙루에 오르면 서원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앙루를 지나면 서원의 입구인 외삼문인 입덕문이 바로 나타난다. 입덕문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외삼문을 지나면 본격적인 서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면의 양성당과 거경재, 정의재 등 유생들이 거처하던 공간이다. 양성당(養性堂)은 사계 선생이 생전에 강학하던 곳으로 응도당이 옮겨오기 전에 사용하던 강당이다. 그 양 옆으로는 학문을 하는 유생들이 모여 경전의 의의를 자세히 강론하던 곳이라는 의미의 정의재, 성리학의 수양 방법 중 하나인 우러르고 받드는 마음으로 삼가고 조심하는 태도를 가짐을 말하는 거경제가 자리잡고 있다.특이하게 강학을 하던 응도당(凝道堂)은 사당과 직각 방향으로 세워져 있다. 보물 제 1569호인 응도당은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사람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이다. 강당으로는 엄청난 규모를 갖추고 있는 응도당은 돈암서원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 될 당시 옛터에 남아있다 비교적 최근인 1971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강학의 공간이 이처럼 크게 만들어진 것은 서원에 제향된 인물의 면면이나 사회·정치적 위세가 매우 컸던 것은 물론 호서 사림의 활동 거점인 대표적인 서원으로서 그 위세가 대단했던 것을 보여준다. 양성당 뒤쪽 내삼문을 지나면 정갈한 숭례사(崇禮詞)가 보인다. 숭례사는 기호사림의 종장인 김장생을 주향하고, 그의 제자인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배향하고 있다.  장판각에는 김장생 선생의 문집인 ‘사례전서’와 그의 부친 김계휘가 당시의 사실을 기록한 ‘황강실기’, 김집의 문집인 ‘신독재전서’ 등과 ‘경서변의’, ‘가례집람’, ‘상례비요’ 등이 보관되어 있다. 또 왕실의 하사품인 벼루와 전적 등도 함께 보관되어 있다. 문화관광해설사는 “예전 숲말에 서원이 있을 당시 수해가 자주 발생해 현재의 자리로 옮겨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큰 사업이었다. 보물로 지정된 응도당은 1970년대 현재의 자리에 터를 잡았다”고 설명했다. 전북 정읍시 무성서원 정읍의 무성서원은 군민들과도 친숙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을 주벽으로 모신 곳이다. 우리나라 유학의 효시로 꼽히는 최치원 선생의 위패를 모신 무성서원(武城書院)은 통일신라 당시 태산고을 군수를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남긴 최치원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태산사(泰山詞)를 태산서원이라 불렀는데, 1483년(성종14) 정극인의 향학당이 있던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이후 1696년(숙종 22) ‘무성(武城)’이라는 사액을 받아 무성서원이 되었다. 무성은 신라시대 태인의 지명이기도 했지만, 공자의 제자 자유가 다스렸던 그 무성과도 같다. 무성서원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를 면할 수 있었던 연유는 결국 최치원이라는 인물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최치원 이외의 무성서원 제향 인물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다른 지역의 향현이라 하여도 좋은 인물들이다. 무성서원이 위치한 곳은 태산현의 옛터이며, 비록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최치원은 태산의 현감으로 부임해 일화와 유적을 남겼으며, 무성서원을 찾는 많은 인사들이 최치원의 행적을 기리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무성서원에는 최치원 선생을 비롯해 신잠(申潛), 정극인(丁克仁), 송세림(宋世林), 정언충(鄭彦忠), 김약묵(金若默), 김관(金灌) 등의 향현(鄕賢)이 배향(配享)되어 있다. 무성서원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낡은 홍살문이 있고, 비각, 현가루, 강당, 태산사 등이 남아 있다. 이 중 태산사 건물은 성종 15년(1484)에 세워져 헌종 10년(1844)에 중수했고, 강당은 순조 25년(1825)에 불타 없어져 순조 28년(1828)에 중건하였다. 조금 모자란 듯 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가 전해지는 무성서원은 소수서원이나 도산서원 같은 그들먹한 위세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대로 오랜 세월의 냄새를 간직하고 있는 이곳은 고종 5년(1868)에 전국의 서원이 철폐될 때도 제외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전북 정읍시 칠보면에 자리잡은 무성서원은 사적 제 166호 지정되었다. 마을 중심부 가옥들로 둘러싸인 무성서원은 여타 서원들이 마을과 멀리 떨어져 풍광이 수려한 곳에 자리 잡은 것과 달리 매우 이례적으로 독특한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무성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마을과 연결되는 무성교를 지나 홍살문을 통해서다. 홍살문을 지나면 앞 쪽으로 무성서원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평지와 다름없을 정도로 얕은 구릉지에 자리 잡고 있는 무성서원은 가장 뒤쪽 높은 곳에 제향 공간인 태산사가 위치하고, 강학공간은 서원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담장 밖 동편에는 기숙 공간인 강수재, 서편에는 비각 등이 위치해 있다. 무성서원은 여타 서원과 달리 간결하면서도 단정된 건물의 배치를 보여줘 검박한 선비정신을 보는 듯하다. 홍살문을 지나면 넓은 마당과 함께 서원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원 정면에는 외삼문격인 현가루(絃歌樓) 높게 지어져 있다. 현가루를 지나면 넓은 마당과 함께 강학 건물인 명륜당이 보인다. 강당인 명륜당은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28년(인조 28) 중건하였으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화합 및 학문 강론장소로 사용되었다. 특이하게도 명륜당 건물에는 벽이 없이 뒤편의 사당이 바로 보인다. 중건 당시 벽을 만들지 않아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는 해설사의 설명이다. 명륜당 뒤편으로는 위패를 모시는 사우(祠宇)가 있다.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의 사우는 성종 15년(1484)에 세워진 것이나 헌종 10년(1844)에 중수되었다. 무성서원을 얼핏 본다면 명륜당과 사당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타 서원들이 강학공간인 강당과 기숙했던 동서재, 사당과 고직사 등 여러 건물이 규범에 맞게 배치된 것과 달리 무성서원의 담장 내부에는 여타 건물이 존재치 않는다. 담장 오른편으로는 동재와 고직사가 자리잡았다. 왼편으로는 2기의 비각이 설치되어 있다. 담장을 통해 명륜당과 사당을 격리한 것은 담 내부, 강학의 공간이며 선현을 모시는 곳의 번잡함을 줄이기 위한 배려로 보였다. 문화관광해설사는 “무성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 속에서도 전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서원이다. 철폐당시 최치원 선생의 영정을 모신 이곳이 그만큼 귀중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이후에도 최치원 선생의 선비정신이 고고하게 내려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남 장성군 필암서원 호남지방의 유종((儒宗)으로 추앙받으며 문묘에 배향된 동국 18현 중 한분인 하서 김인후를 배향한 필암서원(筆巖書院).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자리잡은 필암서원은 1975년 사적 제242호로 지정되었다. 서원의 이름이자 지명인 ‘필암’은 김인후의 태생지인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마을 입구의 ‘붓바위’에서 유래한다. 풍수지리적으로 봤을 때 대학자가 난다고 했는데, 그 대학자가 김인후로 보고 있다. 김인후 선생 사후 30년이 지난 1590년(선조 23) 호남의 유림들은 그의 도학을 기리기 위해 그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장성읍 기산리에 사우(祠宇)를 짓고 그의 위패를 모셨다. 이것이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자 인조 2년(1624)에 김인후 선생이 태어난 황룡면 증산동에 다시 사우를 지었다. 현종 3년(1662)에는 유생들의 요청에 따라 ‘필암’이라는 액호를 하사받고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서원의 입지 조건이 수해를 입을 우려가 있었으므로 1672년(현종 13)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어졌고, 1786년에  고암(鼓巖) 양자징(梁子徵)도 함께 모셔졌다. 그 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도 다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른다. 필암서원은 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평지에 세워진 서원이다. 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사의 공간과 교육과 학문 수련의 공간, 그리고 서원 운영의 공간 등이 전학후묘와 좌우 대칭의 전형적인 유교 건물의 배치를 보여 주고 있다. 외삼문 격의 누문인 확연루를 지나면 강당인 청절당, 동.서재, 내삼문, 사당인 우동사 등이 자리 잡고 있다. 특이한 것은 강당인 정철당과 사당이 마주보게 배치되어 있다. 서원의 정문에는 홍살문과 함께 수백년 된 은행나무가 가장 먼저 반긴다. 외삼문 격으로 출입문인 확연루(廓然樓)는 활짝 열리는 널문이 달려있어 주변 경관을 볼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정면에 붙은 현판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확연루를 지나면 본격적인 강학 공간으로 들어선다. 유생들이 학문을 갈고 닦았던 청절당(淸節堂)은 옛 진원현의 객사 건물을 옮겨 왔다. 원내의 모든 행사는 물론, 유림의 회합, 학문의 토론 장소로 사용된 곳으로 우암 송시열이 쓴 신도비문 중 청풍대정(靑風大節)이라는 ‘하서의 맑은 절의를 되새긴다’라는 뜻을 품고 있으며, 편액은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필암사원은 병계 윤봉구의 글씨다. 양 옆으로는 원생들이 거처하던 동재인 진덕재(進德齋)와 서재인 숭의재(崇義齋)가 자리 잡았다. 필암서원의 장경각인 숭의재(崇義齋)는 인종이 하사한 묵죽도의 판각이 보관되어 있으며, 편액은 정조의 어필로 훼손을 막기 위해 망이 쳐져 있다. 숭의재 바로 뒤로는 사당인 우동사(祐東祠)로 통하는 내삼문이 보인다. 내삼문을 지나면 ‘하늘의 도움[祐]으로 인하여 우리 동방[東]에 태어난 이가 하서 김선생이다’라는 뜻에서 취하고 있는 우동사가 자리잡고 있다. 우동사의 중앙에는 김인후의 위패가, 왼쪽에는 양자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대용 기자※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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