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이 좋은날 가을바람을 쫓아 자전거를 탔다. 달리는 맛이 좋아 욕심을 내다 그만 넘어져버렸다. 일을 당했을 때는 손가락만 좀 아팠다. 며칠이 지나도 몸에는 아무 탈이 없는 듯 했다. 하지만 삼사일이 지나고 아침에 일어나니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타박상이 심했다. 타박상 때문에 황석산성에 오르려고 계획했던 일이 어긋나 버렸다. 그때 생각난 것이 수동면 우명리에 있는 승안산이었다. 그곳에는 눈여겨보아야 할 묘역이 있다. 역사시간에 밑줄을 그으며 외워야 했던 갑자사화,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 그리고 부관참시(剖棺斬屍)······. 그 잔인한 풍경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어스름이 내릴 때 승안사지에 도착했다. 멀리서 노란 달맞이꽃의 몸부림이 선연히 보였다. 달맞이꽃은 점점이 흩어져 나비처럼 춤을 추고 있었다. 석불의 전각이 보이고 삼층석탑이 보였다. 고즈넉한 곳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더 좋았다. 잠시 탑돌이를 했다. 마치 오래된 영혼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 듯 탑 주위를 돌았다. 탑 오른쪽에 산 능선으로 오르는 계단이 보였다. 일두 선생의 묘역으로 가는 계단이었다. 계단 옆으로는 단풍잎이 붉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계단을 밟았다. 심장처럼 붉은 그늘을 지나 묘역에 들어섰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도래솔 속에 무덤이 있었다. 일두 선생의 묘가 먼저 눈에 들어왔고 조금 높은 곳에 부인 완산이씨의 묘가 눈에 들어왔다. 묘소는 조선 전기 사대부의 무덤양식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한다. 묘역 내 석물들도 우수한 작품으로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어 2008년 2월 5일 경상남도기념물 제268호로 지정되었다. 봉분을 덮은 것은 파란 잔디가 아니라 누런 솔가리였다. 잔디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한 귀퉁이에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일까. 잘 만들어진 석물과 석상이 무덤 주위를 지키고 있었지만 무덤은 어딘지 모르게 헐벗은 느낌이었다. 마치 빛과 어둠의 경계에 있는 듯 했다. 헐벗은 느낌은 처참했던 역사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일두 선생은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이곳에서 부관참시 되었다. 부관참시란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난 사람에게 내려지는 극형이다.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형벌이었다. 그것은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아주 큰 형벌이요 수치였다.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은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로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이다. 여러 차례 벼슬에 천거되었지만 매번 사양하였다. 성종 21년(1490) 과거에 급제하여 당시 동궁이었던 연산군을 보필하였다 그러나 강직한 성품 때문에 연산군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1495년 안음현감에 임명되어 일을 처리함에 있어 매사 공정하였다. 그래서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많이 받았다고 전한다. 1498년 유자광 일파가 일으킨 무오사화 때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세월은 대단한 힘을 지녔다. 시간이 지나면 산속의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산의 본래 모습이 드러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꼭꼭 숨겨 두면 드러나지 않을 것 같은 일들도 시간이 흐르면 낱낱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죄가 있는 사람은 벌을 받고 덕이 있는 사람은 존경을 받는다. 결국 수많은 시간이 지나자 최고의 극형을 받았던 일두 선생은 동방오현(東方五賢) 중 한사람이 되었다. 그것이 일두 선생의 본래면목이었던 것이다. 아무 일 없지 않은 공간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낙엽 타는 냄새가 실려 있다. 어딘가에서 낙엽을 태우는 모양이었다. 냄새는 머무르다 흘러가고 머무르다 흘러갔다. 문득 물음 하나가 떠올랐다. 나의 본래면목은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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