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에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한 아내가 작년 9월에 식품회사에 취업해서 생산관리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92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보름 만에 결혼식을 올린 아내는 일찌감치 아들 둘을 낳아서, 지금은 아이들이 모두 대학생이 되었다. 시골 교회 목회자의 아내로서 아이들 뒷바라지도 만만치 않았고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하는 바람에 사회생활을 못한 것도 섭섭했었는데, 마침 식품회사에서 관리직 사원을 뽑는다는 광고를 보고 도전해서 마흔 다섯 나이에 당당하게 정규직 사원으로 입사한 것이다.
몇 년 전에 진주 폴리텍 대학에서 웹 디자인 공부를 한 것이 취업에 큰 도움으로 작용한 것 같다. 다행히 직장에 다니는 동안 아내는 동료들과 잘 지내면서 빠르게 적응해 왔다. 직장에서 아내는 ‘호호 아줌마’로 불린다. 말수는 적으면서 툭하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목젖이 보이도록 ‘하하하하’ 웃어대는 버릇이 있어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 덕에 입사한 지 1년 만에 전체 사원 5, 60명 중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출퇴근을 시켜주는 통근차량 기사님은 가끔씩 과자 봉지를 손에 들려서 집에 보내기도 하고, 회사 사장님은 선물 받은 사과 상자를 헐어서 퇴근길에 몇 개씩 가방에 넣어주기도 한다. 생산 팀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은 집에서 키운 채소나 과일, 유정란 등을 챙겨다 주면서 호의를 베풀어 주신다. 그 중에 한 분은 동생뻘 되는 아내에게 사시사철 텃밭에서 키운 채소를 시시때때로 실어 나르는 분이 있다. 지지난달엔가는 열무를 두어 단 묶어서 보내주시더니, 몇 주 후에는 알타리 무를 한 단 보내 주셨다. 그런데 이번엔 그때 그 열무가 더 자라서 아내의 튼튼한 다리마냥 생긴 굵직한 조선무를 세 개나 보내주셨다.
보내주신 성의도 감사하고, 마침 전에 주셨던 것으로 만든 열무김치나 총각김치도 다 떨어졌기 때문에 이번에는 풋풋한 무청과 함께 무를 썽둥썽둥 썰어서 깍두기를 만들기로 했다. 필자는 무청을 떼어내서 흐르는 수돗물에 두어 번 씻어서 건져 놓고, 녹색에 가까운 싱싱한 무를 물에 씻어서 꼬리를 잘라내고 적당한 크기로 썰었다. 무청은 너무 잘지 않게 세 등분으로 끊어서 무와 함께 통에 담았다. 절이지 않은 무청은 발가벗은 하얀 무를 이불처럼 덮어주었고, 통 안에선 그때부터 무청과 무의 열애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아내는 재채기를 몇 번 하더니 양파 두 개와 마늘 두 통을 까서 양념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난봄에 잘잘한 새우를 사서 젓을 담가 둔 것이 그새 잘 삭아서 질축하게 국물을 머금은 새우젓이 되어 있었다. 아내는 분쇄기에 새우젓 대여섯 숟가락과 함께 양파를 듬성듬성 썰어 넣고는 마늘도 함께 갈았다. 분쇄기는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금방 양파와 마늘을 갈았고, 새우젓과 함께 걸쭉한 국물을 만들어냈다. 노상 잡곡밥만 먹다가 오랜만에 흰 쌀로 밥을 지어서 밥과 고춧가루를 분쇄기에 넣고 매실 엑기스를 적당이 부어서 분쇄기에 또 갈았다. 그렇게 준비된 갖은 양념은 냄새만으로도 군침이 돌 정도였다.
필자는 모든 과정을 열심히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댔다. 드디어 경상도식의 김치가 완성되는 순간이 왔다. 아내는 갈아서 만든 양념을 통 안에 있는 무와 무청 위에 쏟아서 통이 넘지 않을 정도로 덮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이 또 생겼다. 분쇄기를 비롯해서 그동안 김치를 만들기 위해서 사용했던 식기들을 설거지해야 하는 시간이다. 설거지는 원래 나의 전문분야라서 얼마든지 부담 없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전에는 설거지를 하면서 물을 튀긴다고 만날 잔소리를 들었었는데, 이젠 물도 안 튀기고 설거지를 잘한다는 칭찬을 자주 듣는다.
내가 한 일은 무와 무청을 씻고, 적당히 토막을 내서 통에 담고 맨 마지막으로 설거지를 해 준 것 밖에 없었는데, 마치 내가 김치를 담은 것과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긴 옛날 대학 시절에는 4년 내내 자취를 하면서 김치를 담아 먹었기 때문에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주부로서의 감각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바빠서 쩔쩔매는 아내에게 사진 좀 찍어달라고 사정을 해서 완성된 김치 통을 앞에 놓고서 인증 샷을 찍었다. 날마다 카카오스토리에 뭔가를 올리지 않으면 온 몸이 근질거리는 필자는 오늘도 멋진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낸 것이다. 12년 동안 지리산을 끼고 살면서 이제는 입맛도 그렇고, 생활습관이나 말투까지도 경상도식으로 다 변해버렸다. 오늘 담은 김치도 경상도식이다. 내일 저녁에는 아내가 퇴근해서 집에 오기 전에 오늘 만든 김치를 한 번 뒤집어 놓을 생각이다. 절이지 않고 만든 김치라서 저절로 물김치가 되어 있을 것이다. 김치라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김치 애호가인 필자는 벌써부터 김치 국물에 밥 말아먹을 생각에 군침을 흘리고 있다. 그때그때 해 먹는 김치는 김장김치와는 다른 신선한 맛이 있다. 새 김치는 김치냉장고에 두지 말고 상온에서 사나흘 삭혀두었다가 먹으면 아주 맛있다. 이렇게 오늘은 김치가 아닌 풋풋한 행복을 한 통 가득 담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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