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비란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사람의 업적을 새겨놓은 비석이다. 대개 무덤 남동쪽에 남쪽을 향하여 세운다. 조선시대 이후 정이품 이상의 관직으로 뚜렷한 업적과 학문이 뛰어나 후세의 사표(師表)가 될 만한 사람에게는 신도비를 세워 기리도록 하였다. 지곡면 평촌리 주곡마을에는 경남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신도비가 있다. 주곡마을과 개평을 잇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왼쪽에 무덤이 보인다. 무덤으로 가는 길은 풍천노씨의 재실을 통해야 한다. 다행히 재실의 문이 열려있었다. 가을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무덤으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 작은 언덕이 보이고 문화재 표지판이 보였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00호인 옥계(玉溪)신도비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0호인 부부모표와 신고당(信古堂) 신도비 관한 설명이 적혀있었다. 무덤에는 햇살이 가득했다. 따사로웠다. 풍수를 모르는 나였지만 명당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곳에는 검은 염소들이 놀란 눈을 정물화처럼 서 있었다. 낯선 나와 눈을 마주치고 여차하면 덤벼들 태세였다. 나도 시골에서 염소를 부리며 놀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머리에 뿔 달린 염소조차 황소처럼 느껴졌다. 하는 수 없이 염소를 피해 신도비를 감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적요로운 곳에 말이라도 들어줄 녀석들이 있다는 것에 웃음이 나왔다. 옥계 신도비는 인조 9년(1631)에 세워졌다. 사용된 석재는 황해도산 해석(海石,속돌)이며 임금께서 내리셨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청백리인 노진(盧禛, 1518∼1578)선생의 생전 행장(行狀)이 새겨져 있다. 노진(1518∼1578) 선생은 명종 1년(1548)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박사로 관직에 나아가 여러 벼슬을 거쳤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분명히 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남명 조식과 함께 일두 정여창 선생의 학문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했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비의 형태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 몸체를 세우고, 용을 새긴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었다. 귀부와 이수는 원형이 잘 보존 되어 있었다. 거북의 몸체에서는 위용이 느껴졌다. 거북등에 마련된 비좌(碑座:비 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에는 정교한 조각을 두었다. 머릿돌에는 구름 속을 헤치며 6마리의 용이 서로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장면이 표현되었다. 이수의 운용(雲龍) 또한 화려하고 정교했다. 비명은 대제학 월사 이정구(李廷龜)가 짓고, 글씨는 선조의 사위인 동양위 신익성(申翊聖)의 서체로 썼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신도비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금석문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고 한다. 신고당 노우명(盧友明)선생의 무덤은 조금 높은 곳에 위치했다. 신도비 또한 선생의 무덤 앞에 세워있었다. 비는 사암 재질로 만들어졌으며 형태는 옥계 신도비와 흡사했다. 전면의 비문은 당시 우의정이었던 노수신(盧守愼)이 찬술 했다. 글씨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라 일컬어진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이, 두전(頭篆)은 호조참판인 남응운(南應雲)이 썼다. 경상남도에서 드물게 임진왜란 이전(1577년)에 제작된 희귀한 비석으로 밝혀져 신도비와 묘표를 함께 묶어 2012년 경남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무덤 앞에서, 신도비 앞에서 삶을 생각했다. 언젠가부터 하늘 보기가 부끄럽다. 가끔은 부끄러운 지난일이 생각나 혼자서 혀를 찬다. ‘부끄럽게 살지 말자’ 혀를 찰 때마다 맹세한다. 맹세는 항상 욕심 앞에 허물어진다. 오늘 또 다짐한다. 비록 깜박 깜빡 잊어버릴지라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자. 그러면 열 번에 한번쯤은 혹은 두 번쯤은 하늘보기가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신도(神道)라는 말은 사자(死者)의 묘로(墓路), 즉 신령의 길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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