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 우리지역에서 동방5현 중 한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을 모신 남계서원. 남계서원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유서 깊은 곳으로 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에도 살아남았을 만큼 긴 세월을 자랑한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서원의 가치는 이제 단순 교육기관을 넘어 분명 그 역사적 과정과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는 차원에서 세계인들과 함께 공유해야 하는 문화자산임에 틀림없다. 최근 남계서원을 비롯해 우리나라 9개 서원을 대상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남계서원과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 경주의 옥산서원,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대구 달성의 도동서원,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 전북 정읍의 무성서원, 충남 논산의 돈암서원 등이 그곳이다. 오는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다면 남계서원 등 9개의 서원은 우리의 문화자산을 넘어 ‘전세계 인류의 공동유산’으로 인정받게 된다. (글 싣는 순서) 1회 서원의 중심 남계서원, 그리고 세계문화유산2회 한국의 서원①(소수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3회 한국의 서원②(옥산서원, 도동서원)4회 한국의 서원③(필암서원, 무성서원)5회 남계서원, 세계문화유산이 되려면 2011년 ‘한국의 서원’으로 9개 서원 유네스코 잠정등재우리나라 서원건축의 대표.유림에 의한 최초로 세운 서원 지난 2011년 12월9일 ‘한국의 서원’이라는 제목으로 남계서원을 비롯한 국내 9개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잠정목록으로 등재됐다. 당시 잠정목록에는 우리지역 남계서원을 비롯해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 경주의 옥산서원,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대구 달성의 도동서원,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 전북 정읍의 무성서원, 충남 논산의 돈암서원 등이 목록에 올랐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전 단계인 잠정목록 등재 이후 심사 등을 거쳐 등재된다.이처럼 세계적인 위상을 보이고 있는 남계서원(藍溪書院)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세워진 서원이면서, 동방오현 중 한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을 배향하는 곳, 우리나라 서원 건축 및 배치의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 서원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아주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남계서원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원이면서 선비의 고장 함양의 정신적 고향이기도 하다. 유네스코와 세계유산 유네스코(UNESCO)는 세계유산, 인류무형문화유산, 세계기록유산 등 인류가 보존해야할 가치가 있는 다양한 것들에 대해 ‘유산’으로 지정하고 보호하고 있다. 세계유산의 경우 세계적인 가치를 지닌 각국의 부동산 유산으로 자연유산, 문화유산, 복합유산으로 구분한다. 인류무형문화유산은 공동체, 집단 및 개인이 자신의 문화유산의 일부분으로 인식하는 관습, 표현, 지식 및 기술을 포함해 이에 관련된 도구나 사물, 문화공간을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 등이 있다. 세계기록유산은 고문서 등 전 세계의 귀중한 기록물로 우리나라의 훈민정음과 조선왕조실록 등이 포함되어 있다.우리나라는 1995년 해인사 장경판전이 처음으로 세계유산에 이름을 올린 것을 시작으로 문화·자연유산 11곳, 인류무형문화유산 16개, 세계기록유산 11개 등이 등재되어 있다. 세계유산(문화유산, 자연유산)으로는 해인사장경판전(1995), 종묘(1995), 석굴암·불국사(1995), 창덕궁(1997), 수원화성(1997), 고창·화순·강화 고인돌유적(2000), 경주 역사유적지구(2000),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 조선왕릉(2009), 한국의 역사마을 : 화회와 양동(2010), 남한산성(2014) 등이 이름을 올렸다.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는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2008), 판소리(2008), 강릉단오제(2008), 강강술래(2009), 남사당놀이(2009), 영산재(2009), 처용무(2009),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2009), 가곡(2010), 대목장(2010), 매사냥술(2010), 줄타기(2011), 택견(2011), 한산모시짜기(2011), 아리랑(2012), 김장문화(2013) 등이 등재됐다.또 세계기록유산 훈민정음(1997), 조선왕조실록(1997), 직지심체요절(2001), 승정원일기(2001),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2007), 조선왕조의궤(2007), 동의보감(2009), 일성록(2011),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2011), 난중일기(2013), 새마을운동 기록물(2013) 등 다양한 종류의 기록유물들이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이번에 잠정목록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은 세계유산에 포함된 것이다. 세계유산이란 세계유산협약이 규정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유산으로서, 그 특성에 따라 자연유산, 문화유산, 복합유산으로 분류되고 있다. 세계유산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갖고 있는 부동산 유산을 대상으로 한다. 세계유산 평가기준 10가지 중 남계서원 등 ‘한국의 서원’의 평가하는 문화유산의 항목으로는 6가지가 포함되어 있다.Ⅰ.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Ⅱ.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 Ⅲ.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Ⅳ.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Ⅴ.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 Ⅵ.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등이다.잠정목록 등재 이후 자문기구의 현지 실사 및 평가, 그리고 세계유산위원회의 최종 결정을 통해 신규 세계유산으로 최종 결정된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 서원과 향교 조선시대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서 서당과 향교, 서원, 성균관 등이 있었다. 현재로 따져 보면 서당은 초등교육기관이고, 향교는 지방의 공립 중등교육기관, 서원은 사립 중등교육기관, 그리고 성균관은 국립대학이라고 볼 수 있다. 이중에서 서원과 향교는 모두 중등교육기관임과 동시에 선현에 대한 배향하는 신성한 곳이기도 했다. 향교의 경우 중국 선현까지 배향하나, 서원에서는 우리나라 선현에 대해서만 배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중종 12년(1542) 풍기에서 안향(安珦 1243-1306 주자학 도입유학자)을 모신 사우를 세우고 이듬해부터 학생을 모집해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1550년 퇴계 이황이 이곳 군수로 부임해 국왕에게 건의해 학전과 노비를 배정받고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현판을 내리면서 사액서원이 시작되었다. 남계서원의 역사 남계서원은 동방오현 중 한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을 모시기 위해 1552년 창건된다. 일두 선생 50주년을 맞아 개암강익 선생과 지역의 유현들에 의해 서원 건립이 논의되면서 당시 함양지역 유림들은 쌀과 곡식을 부조하면서 건립 여론을 환기시켰으며, 함양군수까지 건립을 위한 물자와 인력을 지원해 7년만인 1599년 완성할 수 있었다. 이후 창건 9년만인 1561년 일두 선생의 신위가 봉안되어졌으며 개암 선생이 초대 원장으로 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이후 지방 유생들의 요구에 의해 창건 이후 14년 만인 1566년(명종 21년)에 ‘남계(灆溪)’라는 이름으로 사액되면서 우리나라 두 번째 사액서원으로서 격상될 수 있었다. 이후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서원이 소실됐으나 1612년(선조 43) 중건되어 그 모습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남계서원에는 정여창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정온(鄭蘊, 1569∼1641)과 강익(姜翼, 1523∼1567)의 위패가 각각 모셔져 있다. 남계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서원 중의 하나로 그 창건 역사는 물론 건물 배치 등 우리나라 서원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서원 건물의 전형 남계서원 남계서원은 이후 조선 서원의 모범으로 채택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형태를 처음으로 갖추게 되었다. 홍살문과 하마비, 그리고 외삼문겸 2층 누각을 들어서면 강당과 동재, 서재 등 강학공간을 마주한다. 그 뒷편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면 제향하는 사당 공간이 자리잡고 있다. 자연을 그대로 이용해 산등성이 경사를 살려 건물을 배치한 남계서원은 초입인 홍살문과 하마비를 넘어 누각인 풍영루를 지나면 비로소 서원의 건물과 마주할 수 있다. 앞쪽의 공간은 강학공간, 이를지나 깎아지른 경사면을 올라가면 뒤쪽에 마련된 제향 공간인 사당이 확연하게 구분되어 진다. 강학공간을 구성하는 중심 건물인 명성당(明誠堂)이 자태를 뽐내며 강당 앞 좌우에는 동재인 양정재(養正齋)와 서재인 보인재(輔仁齋)가 서 있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2칸 규모의 건물인데, 각 1칸은 온돌방이고, 문루인 풍영루(風咏樓) 쪽의 나머지 1칸은 각각 애련헌(愛蓮軒), 영매헌(咏梅軒)이라고 이름 붙인 누마루로 되어 있다. 명성당 오른쪽으로는 경판각이 있어 예전 일두선생의 책판 등이 보관되어 졌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동·서재 앞쪽으로는 연지가 조성되어 있다. 제향과 강학의 공간인 서원에 조금은 향락적 요소가 가미된 연지가 만들어진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존재한다. 일두 선생이 연꽃을 좋아해서 후손들이 만들었다거나, 서원이 자리잡은 지형이 연화산 아래 연화부수형 지형으로 연지를 만들었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내려오고 있다. 명성당을 돌아 조금은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엄숙함이 감도는 사당과 마주한다. 내삼문을 지나면 정면으로 사당, 오른쪽으로는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데우는 곳인 전사청이 서 있다. 사당에는 정여창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정온(鄭蘊, 1569∼1641)과 강익(姜翼, 1523∼1567)의 위패가 각각 모셔져 있다. 또 별사(別祠)에는 유호인(兪好仁)과 정홍서(鄭弘緖)를 배향하였지만 1868년 서원철폐령 당시 훼철되고 서원은 그대로 존속될 수 있었다. 서원 건립 외각으로는 서원의 일을 돌보던 고직사 건물이 아직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당초 남계서원은 창건 당시만 하더라도 30칸으로 지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절반 정도가 남아있어 중건하는 동안 규모가 축소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개발인가 수난인가 남계서원 최근 남계서원 내부의 배롱나무(백일홍) 등이 수난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들려온다. 확인해보니 사당을 감싸며 정취를 자아내던 오래된 배롱나무들이 이유를 모르게 잘려 나가 몇몇 가지만 남아있어 의아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배롱나무는 나무껍질이 없이 매끈한 몸매를 하고 있는 모습이 청렴결백한 선비를 상징한다고 하여 서원이나 정자 등에 많이 심겨져 있는 나무다. 사당 앞쪽 가파른 경사면에 심어진 배롱나무들이 최근 잘려진 것처럼 보였으며, 나무가 사라지면서 훤하게 사당건물만이 남아 옷을 입지 않은 것 같이 느껴졌다. 서원 측에서는 나무로 인해 그늘이 져 건물이 훼손되고 있어 어쩔 수 없이 나무를 잘랐다고 답해 왔다. 사적으로서 남계서원의 건물이 중요하지 그 부속적인 것은 불필요하다는 논리라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지난 2009년 5월 사적 제 499호로 지정된 남계서원의 건물만이 사적으로 지정된 것인지 아니면 서원과 함께 수백년을 살아 숨 쉰 자연도 함께 포함된 것인지 되묻고 싶었다. 잘려진 배롱나무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오자 또다시 있어야할 것이 없어진 느낌이 들었다. 남계서원과 청계서원 사이에서 푸르름을 자랑하던 잘생긴 고송이 없어진 것이다. 바위위에 오롯이 서 있던 아름다운 풍광이 사라졌다. 공사를 하면서 죽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강대용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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