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험대장: 오늘 우리는 후삼국 시대를 공부하겠다. 얼짱 중 얼짱 학생: 나관중의 삼국지가 있고 후삼국지가 있듯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있었는데요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고 신라 천년의 문화를 꽃피우고 신라 하대에 귀족들이 왕이 되려고 150여년간 피터지게 싸우잖아요. 그러는 동안 지방에서는 지방 호족들이 일어나 나라를 세우기 시작하잖아요. 후삼국시대를 정리해 보면 견훤 후백제건국(900년)→궁예 후고구려건국(901년)→왕건 고려건국(918년)→발해멸망(926년)→경순왕 신라항복(935년)→후백제 멸망(936년)→왕건 후삼국통일 고려건국(936년) 이렇게 되잖아요.   탐험대장 문쌤: 뭔 학생이 그렇게 선생처럼 유식해. 그렇다. 역사의 현장을 가 보자. 927년 11월 경주 포석정. 신라 55대 경애왕: 아그들아, 풍악을 울리고 술 따르고 잔 띄워라. 오늘 밤이 다 가도록 한번 실컷 마셔보자. 크윽- 충신 신하: 실컷 마실 것 같지는 않사옵니다. 후백제왕 견훤과 그 부하들이 지금 문밖에 있다하오니 아무래도 지금 떠내려가는 이 술잔이 마지막 잔이 될 것 같사옵니다. 통일신라는 그렇게 망해가고 있었다. 혜공왕이 암살당하고 선덕왕이 시작되는 신라 하대는 150여년간 귀족들간의 왕위쟁탈전으로 20명의 왕이 바뀌는 어지러운 난국시대였다.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의 난(822년)이 일어나고 청해진 해상왕 장보고도 왕권다툼에 끼어들어 얼쩡거리다 중앙 귀족이 보낸 염장에게 암살당했다. 백성은 도탄에 빠져 무거운 세금 때문에 도망가거나 초적(도둑)이 되거나 유랑인이 되거나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원종·애노의 난’(889년)과 붉은 바지부대 ‘적고적의 난’이 ‘못살겠다 갈아보자’ 하고 일어난 농민반란이다. 또한 중앙의 어지러운 이 틈을 타 지방 곳곳에서는 지방 세력가 호족이 사병(私兵)을 키우고 스스로를 성주, 장군, 왕이라 칭하며 세력을 넓혀 갔다. 신라왕의 말씀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골품제라는 엄격한 신분제로 인하여 고위 벼슬에 오르지 못하고 항상 진골 귀족 밑에서 따까리 노릇만 하던 6두품 하위 관리들이 세력가 호족 밑에 들어가 새나라 세우기에 합세했다. 나라가 망할 때 쯤이면 늘 믿거나 말거나 풍문이 난무하여 민심이 흉흉하듯 이 당시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참선과 수행을 하면 누구나 부처(왕)가 될 수 있다는 선종사상이 퍼졌고 풍수 좋은 명당자리에 집을 짓거나 묘를 쓰면 그 집안에서 귀인(왕)이 나온다는 풍수지리설이 유행하여 국론분열을 일으키는데 한 몫을 하고 있었다. 호족들은 누구나 왕이 될 수 있고 신라의 기운이 다 되어 새 나라와 새 왕이 생겨나야 한다는 말에 선종을 적극 후원하였다. 그러자 완산주(전주)에서 아자개의 아들 견훤이 후백제라 칭하고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일대를 장악하며 신라의 수도 경주로 향하고 있었다(900년). 한편 경기도 강원도 평안도 일대에서 신라의 왕족이었던 애꾸눈 궁예가 마진, 태봉이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우고(901년) 미륵불을 자처하며 세력을 불리고 있었다. 세력이 커지자 진짜 왕이 다 된 줄 알고 관심법을 쓰며 날이 갈수록 폭정을 하였다. “나는 미륵불이야. 신통력으로 네 마음을 다 알아. 그러니 붙어먹은 놈이 누군지 말해 봐.” 의처증에 아내를 불로 아랫도리를 지져 죽이기까지에 이르자 신숭겸 홍유 등 4명의 신하 장수들이 궁예를 죽이고 포용력하면 끝내주는 왕건을 왕, 왕, 왕으로 세웠다. 왕건은 수도를 송악(개성)으로 옮기고 고구려를 계승하는 나라임을 나타내어 ‘고려’라 명했다(918년). 거란 야율아보기에게 망한 발해의 유민들이 남으로 내려오자 고구려 후손인 그들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후백제 견훤이 신라를 쳐들어오자 경애왕은 자결하고 견훤은 김부를 경순왕으로 세운다. 견훤과 왕건이 드디어 공산(대구)에서 붙었다. 5000명의 군사를 가졌던 왕건이 형편없이 깨지고 잡혀 죽기에 이르렀다. 충신 신숭겸이 말했다. “왕의 남자 왕건이시여, 그 옷을 벗어 내게 주소서. 이 방법 밖에 없습니다.” 왕건의 옷을 갈아입은 신숭겸이 어마를 타고 도망가자 백제군이 추격하는 사이 왕건은 겨우 포위망을 벗어나 목숨을 간신히 건졌다. 공산전투라 한다(927년). 충신이 무엇인가를 말이 필요 없게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목숨을 던질 줄 아는 이런 충신이 단 한 명만이라도 있다면 왕은 얼마나 행복할까? 충신이 있었기에 왕건은 왕이 되었다. 칼을 갈던 왕건은 3년 뒤 고창전투(안동)에서 백제군을 대파하여 복수를 한다. 견훤이 후처에서 난 넷째 아들 금강을 왕으로 세우려 하자 장남 신검이 형제들과 합세하여 금강을 죽이고 실권을 잡는 일이 일어났다. 아버지 견훤을 익산 금산사에 가두었으나 견훤은 탈출하여 고려 왕건을 찾아가 아들의 복수를 부탁한다. 마침내 대세가 기운 것을 안 신라 경순왕은 왕건에게 굴복하고(935년) 992년을 이어온 신라의 사직(社稷)은 끝낸다. 왕건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나주까지 쳐들어가 마침내 후백제를 멸망시키자 후삼국시대가 끝나고 태조 왕건에 의한 500년 새 왕조 ‘코리아’= ‘고려’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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