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이었다. 극락사지 석조여래입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을 찾아 길을 나섰다. 하늘에서 빗물이 장대같이 쏟아지니 거리는 조용했다. 차도 사람도 다니지 않았다. 극락사지는 서상면 옥산마을에 있다. 옥산천이 보이고 옥산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나타났다. 그 길 따라 올라가면 석조여래입상이 보일 것이라 했다.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갔다. 마을을 지나고 커다란 소나무들이 줄을 선 산길로 접어들었다. 산길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마치 꽁꽁 빗장을 걸어 닫고 비오는 날만 빗장을 풀어 관객을 맞이하는 비밀의 화원 같았다. 하지만 석조여래입상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잘못 들어 선 것일까. 좁은 길에서 겨우 자동차를 돌려 다시 마을로 내려 왔다. 마침 빗줄기가 조금씩 성걸어지고 있었다.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할머니 한분을 만났다. 길을 물으니 마을 오른쪽 길을 따라 가면 능소화가 보이고 그곳에서 우회전을 하라고 했다. 좁은 골목을 얼마가지 않아 능소화 붉게 핀 집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우회전을 하니 할머니가 알려준 대로 회색의 돌부처가 길에서 등을 돌린 자세로 서 있었다. 그곳에는 천연덕스럽게 휘어진 문지방을 넘어야 하는데 일주문이 없었다. 검은 돌로 담을 둘렀고 그 가운데 석불이 서 있었다. 비록 절집은 사라졌어도 여래는 천년의 세월을 이어온 것이다. 석조여래는 1957년 마을주민에 의해 발견되었다. 고려시대의 불상일 것이라 했다. 그리고 극락암 옛 절터로 짐작되는 곳에 세워졌다. 「동국여지승람」에 “극락암이 백운산에 있는데 이제는 없다”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아마 임진왜란 때 없어진 것이라 추정할 뿐이다. 불상은 불신(佛身)과 대좌(臺座)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얼굴은 마멸되어 윤곽만 나타나 있으며 수인도 떨어져 나갔다. 몸체에 비해 상호는 큰 편이었고 어깨는 좁았다. 유난히 잘록한 허리, 몸에 밀착된 양팔, 긴 하체 등은 마치 원통형의 기둥과 같은 인상을 주었다. 양쪽 어깨에 걸친 통견(通肩)의 형식과 얇은 옷 주름이 U자형으로 촘촘하게 흘러내린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불상의 양식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간소화한 다리 와 얼굴 표정, 형식화한 옷 주름 등은 고려시대 석불의 특징을 보여 주기에 통일신라와 고려의 양식을 절충한 고려시대의 석불로 추정된다고 한다. 오래된 석불이 있는 곳은 어디나 적요가 고여 있다.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으고 눈을 감았다. 삶에는 눈을 감아야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눈을 감아야만 더 선명히 보여 지는 것이 있다. 어둠 사이로 검은 기와지붕이 보인다. 지붕 밑에 하얗게 아교로 쓰인 글씨가 보인다. 아! 극락암이구나. 빛바랜 처마 끝에 풍경이 매달려 있다. 바람이 풍경을 때린다. 법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고운 꽃살문이다. 노승의 염불소리와 함께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려온다. 목탁소리는 특유의 청아함으로 산사에 울려퍼진다. 노승이 푸슬푸슬 부서져 내리는 목소리로 법문을 한다. “이 몸 금생에 건지지 않으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건지리까 한번 사람 몸을 잃게 되면 만겁에 돌이키기 어렵구나 우리가 사는 것은 현재요, 그 현재를 최대한 바르게 사는 가르침에 따라 순수한 집중과 몰입으로 자기 자신을 완성하고자 하는 것이 부처님이 도업이구나.” 계곡 쪽에서 바람이 휘익 일었다. 무연히 눈이 떠졌다. 처마의 풍경이, 곱게 채색된 꽃살문이, 노승의 염불소리가 모두 사라졌다. 눈앞에는 오래된 돌부처뿐이었다. 나는 어깨에 내려앉은 적요를 툴툴 털어냈다. 다시 합창을 하고 들길을 걸어 나왔다. ‘자기를 완성하는 것’ 여래가 나에게 준 화두였다. 화두를 가슴에 품고 자동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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