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탐험대장: 고구려에 을지문덕 장군과 양만춘 장군이 있다면 백제에는 계백장군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라에는 김유신, 김춘추 장군이 있고 근세에 와서는 불멸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있습니다. 베테랑 최전선 야전 장군님들을 모시고 오늘날 남북 분단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안보문제를 긴급 진단해 보려합니다.먼저 <안시성>에 나가 있는 현지 기자를 불러 보겠습니다. 얼짱기자-  얼짱기자: 예, 얼굴도 짱, 우리 겨레의 얼도 짱인 얼짱기자입니다. 저는 옛 고구려 땅 요동 남쪽에 있는 고구려 진영 안시성 성곽에 나와 있습니다. 때는 고구려 28대 보장왕 4년(645년) 8월 입니다. 얼마 전 113만명의 대군을 끌고 와 고구려를 침공했던 수문제, 수양제가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으로 개피보고 돌아간 지 얼마 안 되어 중국을 통일한 당 태종이 다시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를 정벌하러 또 달려오고 있는 긴급한 상황입니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웠다는 것을 트집 잡았습니다. 수양제가 범한 과오를 분석하고 대병력보다는 소수 정예부대 위주로 육군 6만, 수군 4만 등 총 10만 명의 정예부대를 편성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습니다. 연개소문이 축성한 천리장성을 따라 신성, 요동성, 백암성, 비사성 등을 대파하며 내려오던 당태종은 이곳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을 맞아 지금 60일 째 고전을 면치 못하고 쪽팔리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탐험대장: 6개월이란 긴 싸움 끝에 결국 장군님께서 이기셨습니다. 역사가들은 장군님의 탁월한 지도력과 청야입보 전술과 고구려인의 결사항전 정신을 승리의 요건으로 뽑고 있는데 청야전술이란 게 뭡니까? 양만춘 장군: 우리나라는 외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거의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방어위주, 수세후공세(守勢後攻勢)의 전법을 주로 발전시켰어요. 특히 중국은 항상 어마어마한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지 않습니까? 때문에 영화처럼 쪽수로는 이길 수 없어요. 그렇다고 항복하겠습니까? 그래서 바로 이 ‘청야입보(淸野入保) 이일대로(以逸待勞)’ 전법이야말로 제1의 전법이지요. 람보와 같이 귀신처럼 나타났다 귀신처럼 사라지는 신출귀몰 작전을 나는 구상한 것입니다. 적이 침입하면 모든 식량을 없애거나 주변을 깨끗이 청소한 후 들어 와 성문을 걸어 잠그고(淸野入保) 장기적인 저항에 돌입함으로써 적의 군량 확보를 어렵게 하고, 적을 우군지역 깊숙이 끌어들여 피로하게 한 이후, 적이 지쳤거나 잠자거나 방심하거나 폭우가 오거나 퇴각을 할 때 기습 공격을 하여 격멸합니다.(以逸待勞)전쟁은 숫자 싸움이 아니지요. 살거나 죽거나 선택의 문제지요. 일당백보다 먼저 있던 고구려 고유의 전투방식입니다.  이순신 장군: 그렇습니다. 원균장군이 패전하고 제가 백의종군에서 돌아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바다에 와보니 배가 12척 밖에 없었습니다. 12척으로 133척을 대항하여 한척도 남기지 않고 다 수몰시켰던 명량해전이 바로 1당 백이지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함이 남아있습니다.” 기도하자 나의 기도가 병사들에 전달되어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계백장군: 훌륭하십니다. 나당연합전선을 구축해 신라가 백제를 공격해 올 때 저는 이 전쟁이 이길 수 없는 전쟁이란 것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살아서 굴욕을 당할 가족을 생각하여 식구를 먼저 죽이고 전쟁터로 나아갔지요. 비록 전쟁에서는 졌지만 불굴의 정신마저 질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645년 4월 개모성이 함락 되고 5월 요동성이 함락되었다. 이어 백암성도 함락되었다. 6월 안시성을 공략할 무렵 고구려 15만 구원부대가 왔지만 중도에서 격파되고 말았다. 당 태종은 항복한 고연수를 안시성 아래로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나 양만춘은 죽음을 걸고 결사 항전을 선언했다. 당 태종은 공성장비로 매일 6~7회씩 공격을 퍼부었다. 그럴 때마다 양만춘은 파괴된 성벽을 보수하면서 적의 성내 진입을 막는 한편 야간에는 특공대를 편성하여 적을 기습했다. 당나라군이 60여 일 만에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토산을 완성하여 최종공격을 준비하는 순간 양만춘 장군은 준비한 저수지를 터뜨려 토산 일부가 무너질 때 도리어 점령하고 있던 토산을 빼앗고 수비진지로 만들어버리자 당 태종은 어이가 없었다. 한편 고구려 사신을 태운 말은 들판을 가로질러 돌궐왕에 가고 있었다 “지금 당의 서울 장안이 비어 있으니 쳐들어가심이 어떠하신지요.” 돌궐군이 당의 후방을 쳤다. 당 태종은 9월 급히 명령을 내려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국사 탐험대장: <안시성 전투>는 문무겸비한 한 지도자의 용맹과 지략이  쪽수가 안 되어도 어떻게 나라를 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준 통쾌한 전사(戰史)였습니다. 양만춘 장군님의 이름이 야사로 내려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지만 고구려 후손들의 인사를 받으십시오. 양만춘 장군: 야사나 정사(正史)나 다 역사 아닙니까? 나는 상관없소이다. 내 나라, 내 백성, 내 가족, 무엇을 지킨다는 것에는 목숨이 걸려 있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무엇을 지킨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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