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한옥의 정겨움이 한껏 살아있는 지곡면 개평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 위에는 일제말 조선 바둑의 일인자로 군림했던 노사초(盧史楚) ‘국수’를 기리는 사적비가 우뚝 서있다. 지난 2008년 8월 건립된 사적비는 수많은 바둑인들이 찾는 명소이다. 사적비와 함께 함양에서는 매년 8월 마지막주 노사초 선생을 기리는 바둑대회가 열린다. 올해로 6회째인 노사초배 전국 아마바둑대회는 전국 최고 대회로 성장했다. 사초 노석영(근영) 선생. 일제 말 암울한 시대에 혜성처럼 나타나 일본 바둑의 강자들을 꺾으며 민족의 한을 달랬던 그를 기리기 위한 바둑대회에서 그의 손자인 노문환(55)씨를 만나 노사초 선생과 향후 그와 관련된 사업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그는 “다 고맙고 감사하다. 할아버지의 업적을 기리는 바둑대회가 점점 자리잡아 갈 수 있게 만들어 줘서 정말 고맙다. 함양군과 바둑협회. 그리고 군민 여러분께 감사할 따름이다”라며 그의 할아버지를 기리는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는 함양군에 감사를 표했다. 바둑대회 일정 동안 계속해서 경기장에 머물렀다는 그. 수많은 바둑인들을 만나 그의 할아버지 노사초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정보를 교환했다. 노문환씨는 최근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할아버지의 생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다. 그는 “그동안 일을 하느라 바빠 할아버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이제야 그분의 행적을 따라가고. 또한 정신세계도 새롭게 연구하고 있다. 할아버지의 업적을 재정립해 후손들의 좋은 본보기로 삼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현대의 바둑은 조남철씨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 정론으로 통한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이미 할아버지는 1930년대 전 조선바둑대회에서 우승하며 국수로 불리는 등 현대바둑으로 넘어올 당시 초기 멤버이다. 조선말 국수들이 많았지만 문헌에는 유독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많이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노사초 선생의 스승은 백남규 국수로 알려져 있다. 30세의 늦깎이로 바둑에 입문한 노사초 선생은 10년만에 최강으로 꼽히던 스승을 이겼다. 이후 전국을 돌며 바둑을 두는 등 기행을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노사초 선생은 ‘바둑기인’이나 ‘내기 바둑의 명수’. 또는 ‘한량’으로 알려져 있다. 노문환씨는 그의 할아버지 노사초 선생이 왜 전국을 유랑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그는 “곡성에 가면 바둑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할아버지가 한달간 머물렀다 해서 공원을 조성한 것이다. 이곳은 한일합방 당시 자결한 이가 있을 정도로 우국충정이 남달랐던 곳으로 한달간이나 머물렀다면 분명 기록으로 남길 수 없는 특별한 상황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국을 유랑하며 내기바둑을 두었던 노사초 선생. 불명예를 안으면서까지 그가 전국을 유랑했던 것은 독립자금을 만들기 위한 행동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설명되는 것이다. 출중한 가문의 자손으로서 특히 마지막 과거시험이었던 1894년 18세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노사초 선생의 이 같은 행적도 재평가해야 할 대목이다. 국수로 추앙받는 노사초 선생의 후손들 모두 바둑을 두지 않았다. 1년에 한달 정도 집에서 생활했던 노사초 선생. 유랑길에 집에 들르면 헤진 옷에 볼품없이 돌아오는 모습을 본 그의 할머니가 일절 바둑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노사초 국수에 대한 기록은 그의 전무한 실정이다. 대부분이 야사(野史)에 많은 의지를 하고 있다. 하지만 개평마을에는 생가가 잘 보존돼 있으며 아직도 그의 며느리 이정호 여사가 남아 사초 선생을 이야기 하고 있다. 개평마을 노사초 생가에는 많은 유물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도둑을 맡았다. 그는 “향후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할아버지의 유물관이 만들어진다면 그에 걸맞는 유물들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자료를 모으고 있다. 지금 하지 않으면 힘들 것이다. 간접적으로나마 할아버지를 느꼈던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노문환씨는 “함양은 선비의 고장으로 성리학에 대한 공부는 많이 있다. 일두 선생이 성리학을 발전시켜 많은 후학을 배출해 한 축을 이뤘다면. 바둑 또한 함양을 이끌었던 한 축으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라고 설명했다. 복원된 생가의 확장에 대해서도 그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현재의 생가 이외에도 수많은 부속 건물이 있었지만 사진 등으로 남아있지 않아 완벽한 복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도문화재자료나 함양군사 등을 보면 현재의 생가 이외에도 부속건물들이 있었다고 전해져 이 또한 철저한 고증을 거쳐야할 대목이다. 그는 “문화재니까 더 정확하게 복원해 바둑인들의 공간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라며 “바둑대회 참가자들이 생가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할아버지의 기운을 받을 수 있고. 결승전도 이곳에서 진행하는 등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라며 큰 밑그림을 거렸다. 그는 ‘노사초 공원’을 조성하는 큰 꿈도 함께 진행해 나가고 있다. 끝으로 노문환씨는 “할아버지(노사초 선생)를 기억하는 이들이 살아 있을 때 사업이 진행되어야 스토리텔링이 가능할 것”이라며 “정부에서 이곳의 활용방안을 마련해 준다면 후손들은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도록 내놓을 수 있다. 이것이 가문을 빛내는 길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강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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