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색으로 채색된 나무 대문 앞이다. 고개를 드니 이층에는 누각이 보인다. 현판에는 태극루(太極樓)라 적혀있다. 함양읍 교산리. 지금은 원교길이라 불리는 곳에 우뚝 솟은 목조건물이 바로 함양 향교(경남유형문화재 제225호)이다. 향교는 유교의 옛 성현을 받들며. 지역 사회의 인재를 양성하고 미풍양속을 장려할 목적으로 설립된 지방교육기관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제사만 지내고 있다고 한다. 조승숙(趙承肅) ‘명륜당기明倫堂記’에 의하면 태조 7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대성전을 중수하고 동재. 서재. 문루를 건립했다고 한다. 태극루의 대문은 굳게 잠겨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학문을 연마라는 명륜당(明倫堂)이 보일 것이고. 뒤에는 공자와 저명한 유학자의 위패가 모셔진 대성전(大成殿)이 자리할 것이다. 전형적인 전묘후학(前廟後學)의 양식이다. 굳게 닫힌 문 틈사이로 안을 본다. 돌계단만이 눈에 들어온다. 저 돌계단을 처음 밟았던 때가 춘향석전대제봉향(春享釋奠大祭奉享)이 열리던 날이었다. 대성전 뒤에 서 있는 굵은 소나무는 창창히 푸르렀고 그 사이로 물빛 하늘이 보였다. 춘삼월. 겨울의 흔적은 있었지만 햇살은 포근했다. 엄숙한 가운데 제사는 거행되었다. 옛날 같으면 어찌 여자가 참관이나 할 수 있었을까. 시절이 좋아 그곳에 당당히 서서 제사를 구경할 수 있었다. 제사라는 것이 그렇다. 위패 앞에 술을 올리고 절을 올리고. 또 술을 올리고 절을 올리고······. 지루하지는 않았다. 다만 대성전 안에서 행해지는 그 모습을 직접 볼 수는 없어 아쉬움은 있었다. 제사가 끝나고 명륜당 대청에 앉아 여러 가지 토의가 있었다. 제사에서 무엇은 좋았고 무엇은 잘못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참석한 모든 분들게 음식을 조금 나누어 주었다. 명태 한 마리. 대추. 밤. 잣 등 이었다. 그 순간 코흘리개 적 고향에서 지내던 묘사(墓祀)가 생각났다. 보랏빛의 들국화가 지천으로 피고 망개가 빨갛게 익어가던 가을날이었다. 까만 얼굴을 가진 동무들과 보자기를 옆구리에 두르고 어른들의 뒤를 쫓아 산소에 갔었다. 산소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에 어린 아이들이 가기에 그리 만만한 길은 아니었다. 하지만 묘사는 잔치 같은 날이었다. 험한 숲길에도 발걸음은 신이 났었다. 제사가 끝나면 우리는 보자기를 펴고 음식을 받을 준비를 했다. 노란 시루떡. 문어 다리 몇 개. 사과 하나. 배 하나. 밤 몇 알. 조상님 묘 앞에서 떡을 먹으며 참으로 행복했다. 그곳에는 푸른 바람 있었고. 청명한 하늘이 있었다. 그리고 허물없는 내 동무가 있었다. 제사에 쓴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을 음복(飮福)이라고 한다. 비록 음식을 얻는 재미로 묘사에 참석했지만 조상을 받드는 정성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자연스레 뿌리를 알아갔고 긍지를 가지게 되었다. 제사떡을 먹을 수 있게 한 조상님께. 내가 존재하는 것에 감사했다. 향교에서 주는 음식을 받아들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유도회는 행사에 참석해 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작은 음식을 마련했던 것이리라. 옛 전통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이렇게 선물까지 주다니. 나 또한 감사했다. 세상은 남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곳이다.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감사하는 마음’이 아닐까. 감사하다보면 서로를 존중하게 된다.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결국에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게 될 것이다. 그것이 옛 성현의 삶을 닮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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