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말 어느 따뜻한 봄날이었다. 한 중년 신사가 서울강서경찰서 근처에서 신호위반을 했다. 교통순경이 차를 세웠다. 훤칠하게 생긴 신사는 점잖게 말했다. “번호 봐 번호.” 그 신사는 남도부의 아들 하상영이다. 남도부는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의 등장인물인 하준규이다. 하준규는 하준수라는 실존인물이다. 남도부는 해방정국에서 보광당이란 단체를 조직했고 지리산을 중심으로 암약했던 좌익게릴라부대인 남부군 전투부사령관을 지냈다. 하상영 역시 범상한 인물은 아니다. 연좌제에 의해 빛을 발하지 못했을 뿐이다. 하준수의 고향은 함양이다. 하준수는 지리산이 품고 있는 우루목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우루목은 물이 모이는. 물이 풍부한 마을이다. 물은 재물을 뜻하기도 한다. 재물이 있으면 벼슬을 살 수 있고 명예도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재관인財官印 또는 부귀공명富貴功名 이라 했다. 하준수 집안은 돈과 권력이 상승 작용하는 선순환이 오래 지속해왔다. 하준수는 일본 유학을 한 부르조아 출신이다. 우루목 앞뒤 뜰의 전답 대부분이 하준수네 소유였다. 우루목을 지나는 사람은 하준수네 땅을 밟지 않고는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재산들은 하사마로 불리는 하준수의 증조부인 하재구로부터 아버지 하종택 대에 이르기까지 일군 재산이다. 하재구는 조선조 철종 때 관직에 나가 대구에 있던 경상도 병영의 군사마를 역임하였고. 하종택은 일제 강점기 때에 22살부터 오래 동안 병곡면장을 역임하였다. 부불삼대富不三代라고 그 많던 재산은 하준수 대에 이르러 없어진다. 하준수가 공산주의가 된 것은 시대적 상황의 영향이 큰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많은 청년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공산주의가 조국독립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불행은 해방 후에도 계속 공산당 활동을 한 때문이다.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비추면 신화가 된다고 했던가. 역사와 신화 사이로는 전설이 있다. 하준수에게는 전설적인 일화가 있다. 해방이 되자. 그는 자기 집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모아 놓고 폭탄선언을 했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당신들도 이제 해방이다. 이곳을 떠나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하라.’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이곳저곳에서 뿌리박고 살아가게 된다. 외국생활을 하고 시대를 앞서간 하준수는 어쩌면 한때 이 세상을 크게 변혁시켜보겠다는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본론이나 레닌의 저서를 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본론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공감과 연민. 양심의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이다. 하준수의 아들 하상영이 국회의원에 출마한 적이 있다. 하상영이 선거운동을 하러 다닐 때 어느 노부부가 하상영을 맞아들여 도련님하고 부르면서 지난 일을 이야기 했다는 말이 널리 퍼진 적이 있었다. 하준수는 변장술이 능했다고 한다. 변장술에 능했던 탓에 생긴 신출귀몰한 여러 이야기가 신비감을 더해가며 전해지고 있다. 산 생활을 하다 하산했다는 정보에 따라 경찰이 체포하려고 집주변을 에워싸고 있어도 일꾼 속에 섞여 포위망을 뚫고 유유히 사라졌다.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지게를 한쪽 어깨에 맨 채 무리지어 나오는 일꾼으로 변장하여 도망치는 순발력 있는 재치와 대담한 용기를 가졌다. 산생활의 경험이 강한 품성과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 키웠는지 모른다. 하준수에 대한 자료는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그에 대한흔적은 날이 갈수록 지워지고 있다. 가족들을 중심으로 한 야사에서 찾을 수 밖에 없는데 이런 야사마저 찾기가 쉽지 않다. 나의 외갓집이 우루목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 하준수 집에 가본 적이 있다. 하준수의 동생 하영수가 형님하고 중학교 동기다. 형님하고 외가 집에 갔다가 하영수를 만나 놀러 갔었다. 당시 대부분의 집들은 대문이 없거나 싸릿문 이었다. 그 집은 큰 대문이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니 넓은 마당 한쪽에 나락을 저장하는 짚으로 만든 노적가리가 있었다. 노적가리 옆을 구렁이가 기어가는 모습을 보고 놀란 기억이 생생하다. 하준수의 부인은 명당에 조상 묘를 써 당대 천석꾼이 된 이석신의 손자인 사근부자 이민종의 딸이다. 이민종의 집은 현재 나주 임씨 재실로 사용되고 있는 화산서원이다. 우루목은 하준수라는 걸출한 인물 때문에 다른 것은 묻혀버리고 있다. 나무가 크면 그늘도 지게 마련이다. 우루목은 하준수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많다. 그의 친척과 사상적 동조자등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다.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밑바닥에는 원망도 흐르고 있다. 남도부는 이미 역사의 저편으로 넘겨진 사람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언급은 무척 조심스럽다. 그 이유는 6.25동란을 통한 동족상잔의 아픔과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다만 함양이 낳은 인물의 한사람이며 시대적 차이는 있지만 그와 같은 고향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들 하상영과 선후배로 연결된 역사의 한 고리에서 이 땅에 살아가기 때문에 전혀 무관심할 수 만은 없다. 조선 선조 때 지었다는 하준수의 생가는 돌보는 사람이 없어 퇴락하여 곧 쓰러질 것처럼 보인다. 현재는 정부 정부지원이 어렵고 뜻있는 사람이 구입하여 보수 관리 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하준수의 생가가 복원되고 대청의 한 벽면에 소설 남부군. 지리산 태백산맥 등을 꽂아놓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차 한 잔 건 낼 때쯤이면 관광자원으로 한 몫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봄이 오고 들에 아지랑이 피어오르면 하재구가 세운 정자 하한정이 있는 강 건너 솔숲에는 또 다른 신화가 잉태 될런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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