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암자 중 ‘제일은 금대(金臺)’라는 말이 있다. 금대암은 마천면 가흥리에 있는 전통사찰 제 48호이다. 신라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나한전을 모신 후 신라 태종 무열왕 때 행호조사(行乎租師)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지형이 지리산 봉우리들이 지척에 바라보이는 절경 때문에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수도 성취했다는 구전이 전해오고 있는 암자이다. 금대는 정토경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공덕이 있는 사람이 임종할 때 서쪽으로부터 수많은 성중(聖衆)과 아미타불이 마중을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공덕이 높은 사람을 금대(金臺)에. 그 다음을 은대(銀臺)에 앉힌다고 했다. 언감생심 앉아보기를 꿈꿀 수 없는 금대를 찾아 길을 나섰다. 덕유산에서 뻗어 내려온 금대산 비탈길을 가파르게 올랐다. 정상이 가까워 질 무렵 경사면에 아담한 터가 나왔다. 그 길을 따라 가니 금대암이 보였다. 척박한 터에 자리 잡았기에 절터가 그리 넓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리산 제일방장의 명성답게 천왕봉과 좌우의 영봉들을 바라보며 가람이 배치되어 있었다. 금대선원(金臺禪院)을 지나니 맛배 지붕의 목조건물이 보였다. 벽에는 벽화가 그려졌다. 그리 잘 그린 그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장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깡마른 몸매에 고즈넉이 삼매에 잠겨있는 싯타르타의 모습이었다.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디선가 본 듯 형언할 수 없는 반가움과 까닭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아마 벽화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어느 한 생. 금대암과 어떤 짧은 옷깃의 스침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들어 무량수전으로 향했다. 오방색의 단청이 곱게 퇴색된 꽃살문이 보였다. 무량수전은 나무로 꽃을 만들고 그 뒤에 유리를 대었습니다. 조심스레 꽃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느 법당과 다르게 툇마루가 있었다. 좌측 벽에는 신중탱화(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9호)를 모셨다. 신중탱화는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그려졌다. 좌우상하에 팔부신장(八部神將)과 십이지신장(十二支神將) 등 몇 분만 간략하게 묘사되었다. 불교의 호법신들을 묘사한 불화로 명문에 의하면 정조9년(1785년)에 조성되었다. 탱화 속에 나오는 신장들은 부처나 보살들 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신이다. 그들은 부처님을 옹호하고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어떤 탱화보다도 우리나라 재래의 신들이 많기에 고유의 특성이 강하다. 이것은 재래 토속신앙의 불교적 전개를 의미하는 것이다. 신중을 바라보니 초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수학여행을 불국사로 갔다. 그때의 나는 불교가 미신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부처님 앞에서 까불까불 거렸다. 생각해보면 철없다 못해 어리석고도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절을 올리는 부처님을 깔보고 업신여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신중의 눈총을 받았던 것이다. 신장은 정말 살아있는 듯한 눈동자로 나를 위협했다. 정말 탱화 속에 신장이 존재했던 것일까. 전류 같은 섬짓함이 온 몸을 덮쳤다. 눈총은 나의 심장에 깊이 박혔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너무 부끄러워 아무에게도 그 일을 이야기 하지 못했다. 살아오면서 그때의 행동이 문득문득 떠오르곤 한다. 어쩌면 그 실수가 나를 성장하게 했다. 불교를 바로 알게 만들었고 타 종교를 존중하게 만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며 살아간다. 지금도 나는 며칠 전의 실수로 부끄럽고 가슴 아프다. 아무리 참회를 하여도 혼자만의 부끄럼과 아픔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도 참회하며 살아갈 것이다.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살아갈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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