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보 43편 50년 함양 귀금속의 산증인 해성당 김을식 사장 최근 금값이 요동친다. 불과 1년전만 해도 25만원을 호가하던 금값이 최근에는 20만원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무섭게 요동치는 금값 속에서도 초연히 금은방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다. 함양에서 근 50년 반평생을 귀금속 가게를 운영해 온 해성당 김을식 사장(69). 그는 함양 귀금속의 산 증인이다. “예전만 해도 순금은 지금처럼 등락이 심하지 않았어. 이렇게 금값에 일반 사람들이 민감해진 건 IMF 이후부터라고. 사람들이 경기변동에 위기감을 느끼면서 금에 관심을 두게 된 거지” 함양은 그에게 제3의 고향이자 그가 뿌리를 내린 곳이기도 하다. 그의 원 고향은 충무. 이후 남원 산례에서 생활하다 1964년 함양에 터를 잡았다. “내가 아마 함양에 정착한 것이 동경올림픽 할때일꺼야...”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처음부터 귀금속을 판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중고시계를 사다가 팔기 시작했다. 조금씩 안정을 찾자 새 시계를 팔기도 하고 이렇게 몇 년이 흘렀다. 그리고 시작한 것이 금은방. “금 20돈으로 시작했어. 그때가 72년도지. 한 돈에 2.500원~2.800원이었으니 지금 시세하고는 비교 자체가 안되지” 그는 제일 먼저 시계 고치는 기술을 습득해야만 했다. 작은 부품들이 결합된 시계를 고치는 일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밤을 세워가며. 통금이 끝날 때까지 혼자서 시계 부품들과 씨름했다. 어느 정도 기술습득 이후 본격적인 시계 판매와 함께 금은방도 운영할 수 있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함양에 금은방이 4개 밖에 없었어. 이후 60~70년대 함양 인구가 10만이 넘어가던 시절에는 13곳까지 늘어났지. 근데 IMF 이후 대부분이 문을 닫고 이제 5곳으로 줄어 들었어” 해성당은 수십년간 한 자리 만을 고수하고 있다. 함양시장 초입에 자리 잡은 그의 가게는 1968년부터 지금까지 한곳에서 손님들을 기다린다. 해성당. 바다해(海) 성할 성(成)자를 쓰서 바다같이 번성한다는 뜻의 그의 가게는 한때 잘나갈 때는 직원을 5명 거느리는 함양의 대표 귀금속점이었다. 금 세공기술자가 3명에 시계 기술자가 2명. 그까지 포함하면 6명이 일해도 손에 부칠 정도로 장사가 잘됐었다. 현재 그의 곁에는 강철호(44) 기사가 함께하고 있다. 강 기사도 이곳에서 함께한 지 25년째라고. 김을식 사장은 “우리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기사가 아니라 식구. 가족이야. 그래서 금고 열쇠도 맡기고 돈도 아무렇게나 놔둬도 상관없어”라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가 많은 직원들과 함께 일하면서도 직원들은 그의 집에서 숙식을 함께 했다고. “사모님이 많이 힘드셨겠어요. 사장님보다 사모님이 더 대단하시네요”라고 하자 “암. 집사람이 고생 많았지. 시동생들 다 챙겼지. 자식들 훌륭하게 키워냈지. 또 일하는데 많이 도와줬지. 나보다 훨씬 대단하지”라며 은근 자랑하기도 했다. 그때 30대 주부로 보이는 이가 금반지를 팔기 위해 찾았다. 김을식 사장은 핸드폰을 꺼내 그날의 금 시세를 확인시켰다. “금값 속이고 할 수 없는 시기야. 오늘 얼마에 매매되는지 다 알고 찾아오는데. 신용을 지켜야지. 아끼던 금붙이를 내다 팔려는 사람은 얼마나 속이 상하겠어” 결혼예물을 들고 와 눈물짓는 서민들과 함께 50년 세월을 보낸 김을식 사장. 그는 요동치는 금 시장에서도 성실과 정직을 무기로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손해 없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요즘은 IMF 당시보다 장사가 안된다고 하소연이다. 그는 “요즘 장사. 어려워. 특히 귀금속은 더욱 그래. 가격이 워낙 비싸서 사지를 않아. 결혼 예물. 이것도 옛말이야. 금값이 너무 비싸니까 예물도 커플링 같이 간단한 걸로 해결하고 수백만원짜리는 거들떠보지도 않지”라고 말했다. 그는 한때 거창세무소 관할 거창과 함양지역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내기도 했다. 그는 “세금 말이 나와서 하는 건데. 귀금속 팔아 3~4% 남는데 세금은 30%를 낸다. 세무서 직원하고도 싸운 적도 많다. 세법이 이상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예전 한창 함양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예식장에서 1년에 300쌍 이상이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결혼식의 필수품이기도 한 귀금속점들도 함께 전성기를 누렸다. 그것도 잠시. 현재는 1년에 50건도 되지 않는 결혼식에다가 경기가 어려워 귀금속을 장만하지 않는 이들도 많아졌다고. “예전에 장사는 진짜 재미있었어. 손님이 찾아오면 막걸리도 한잔씩하고...” 그는 어느덧 희미해져 가는 옛 기억을 더듬기도 했다. “IMF 시절에는 팔려는 사람이라도 있었지. 지금은 사려는 사람. 팔려는 사람 아무도 찾지 않아. 생활이 어려우니 지갑이 닫히고 제일 줄이는 것이 사치품. 특히 귀금속이지. 지금 막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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