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촌놈 글로벌 리더로 우뚝 서다 디케이락(주) 노은식 회장   장마가 시작됐지만 비는 내리지 않고 후텁지근한 날이었다. 이른 아침 우인섭 대표이사와 함양을 출발할 때는 간간히 햇살이 구름사이로 머리를 내밀었지만 김해가 가까워지자 먹구름이 잔뜩 하늘을 덮었다. 미리 마중을 나와 주신 박호철 지사장님과 함께 주촌면에 위치한 ‘디케이락(주)’을 찾아가 그를 만났다. 바로 재김해함양군향우회를 맡고 있는 노은식 회장. 공장 정문을 들어서자 공장을 둘러보고 있던 노 회장이 반갑게 일행을 맞았다. 작은 일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는 그의 모습에서 고향 사람을 챙겨주는 마음이 느껴졌다. 이날 만남에서는 김해향우회 임원으로 노은식 회장과 함께 향우회를 이끌고 있는 정병호(대성금속 대표) 사무총장과 조하석(동영특수강 대표) 총무가 함께했다. 향우가 모여 있는 모습이 참으로 정겨웠다. ‘작은 회사’이라 생각했던 그의 공장은 족히 수만평은 되어 보이는 넓은 면적에 공장동과 사무동으로 나눠 주위를 압도했다. 공장동에서는 직원들이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 요즘 제일 잘나가는 회사임을 실감케 했다. 그의 사무실로 들어서니 사무실 곳곳에 설치된 대형 장식장을 빼곡히 메운 상장과 상패. 감사장 등이 그의 성공을 느끼게 했다. 직원 수 230여명. 2012년 매출액 469억원. 수출액 2.646만달러. 지난해 말 수상한 ‘2000만불 수출탑’은 오늘 찾은 이곳 ‘디케이락’이 세계로 뻗어 나가는 글로벌 기업임을 다시한번 확인 시켰다. 첫번째 이야기. 누구나 힘들었던 시절 “저의 고향은 함양군 백전면 오천리입니다” 1956년 함양군 백전면 오천리 83번지에서 태어난 노은식 회장. 집 인근의 대평초등학교 5학년에 다닐 당시 지병에 고생하시던 그의 부친이 돌아가셨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래도 단란했던 가정의 가장의 부재는 어렸던 그에게는 힘든 날의 시작이었다. 초등학교 졸업까지 1년 동안 그가 농사일을 도맡아야만 했다. 어린 그에게는 너무나 힘에 부치는 일들로 졸업 후 부산으로 이사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부산에서 동아중학교와 건국고등학교를 다니며 그의 제종 형님이 운영 중이던 볼트공장에서 일했다. 주간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야간에는 공부를 하는 ‘주경야독’의 시절. 군대를 다녀 온 후 그가 어려서부터 일했던 볼트 공장과 비슷한 사업체를 시작하면서 지금의 대역사의 막이 올랐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배움에 늘 목말랐던 거의 최종 학력은 MBA(경영학 석사 : Master of Business Administration) 졸업이다. 또한 그는 글로벌 리더로서 우리나라 산업 발전에 이바지해 동의대학교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인해 학업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그는 이제 전문 경영인으로서 세계무대를 누빈다. 1986년 천막공장인 대광닛불 상사를 설립한 이후 약 30년만에 국내를 넘어선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구멍가게에서 시작해 이제 어엿한 상장회사가 됐다. 다른 친구들 놀고 있을 때 힘들게 새벽까지 일하고. 토요일 일요일도 쉬는 날이 없었다. 현재도 6시30분 출근 10시 퇴근 등 정신없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노력에는 장사가 없듯 그의 성공 스토리는 그저 이뤄지지 않은 노력의 산물이었다.  두번째 이야기. ‘성공신화 끝이 아닌 이제 시작이다’ 디케이락 노은식 사장의 성공신화. “언제 성공했다는 것을 느끼는지요”라는 물음에 노은식 사장은 “지금은 성공이 아닙니다. 우리 회사보다 앞선 회사들이 전 세계적으로 많이 있습니다. 기술을 선도하는 기업이 되어야 합니다. 히든 챔피언으로서의 입지를 다져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모두가 어려워하는 IMF 시절에도 노은식 사장의 디케이락은 승승장구했다. 어찌 보면 힘든 시기였다. 공장을 옮긴 7개월 이후 IMF가 터지면서 모두가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는 위기를 성공으로 바꿨다. “세계 금융위기가 닥쳤을 땐 그동안 우리가 뚫지 못했던 시장을 공략하는 절호의 기회로 활용했습니다. 주요 글로벌 기업들은 경기가 나빠지니까 원가 절감 차원에서 여러 부품업체를 물색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죠. 위기 속에는 분명히 기회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산업의 부진 이후 최근 정부에서는 해양 플랜트 산업에 대한 지원 등을 통해 차기 주력산업으로 삼을 요량이다. 이에 따라 디케이락도 날개를 달았다. “최근 많은 양의 플랜트 수주와 원자력 발전 붐은 우리에게 큰 기회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우리는 미리 준비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인력과 여건을 갖추고 있다면 정보만 있으면 성공의 열쇠를 쥐게 되는 것입니다. 돈이 될 만한 아이템을 찾아야 합니다” 전 세계를 누비는 글로벌 기업답게 그는 비즈니스에 전 세계의 인맥을 활용한다. 정보가 필요하면 전 세계에 퍼져있는 정보 인맥을 활용하고. 기술이 필요하면 직접 찾아가 인재를 스카웃한다. 그의 사무실 3층에는 200평 규모의 연구실에서 10여명의 연구 인력들이 세계 일류를 꿈꾸며 연구에 매진한다. 또한 수십억을 호가하는 품질관리 장비들이 생산된 제품의 신뢰도를 높인다. 이 모두가 미래를 위한 투자인 것이다. “중소기업은 종합예술입니다. 생산과 연구. 구매. 마케팅 등 모든 부서가 톱니바퀴 굴러가듯 맞춰져야만 세계시장에 도전장을 내밀 수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 이야기. 글로벌 기부 통한 봉사 활동 오는 2014년 창립 30주년을 맞이하는 노은식 대표. “내년 창립 30주년을 맞아 기념이 될 만한 사업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엄홍길 휴먼재단이 네팔에 학교를 건립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엄홍길 휴먼재단이 세운 네 번째 학교를 찾아가 기부하면서 우리도 학교를 지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노은식 대표의 글로벌 도네이션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그의 지인들과 네팔 안나푸르나 트레킹에서 우연히 듣게 된 엄홍길 재단의 학교 건립사업. 그는 지체하지 않고 연락을 취재 학교 설립을 성사했다. “디케이락이 지구촌의 일원으로 우리 몫을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되는 것입니다” 기부문화가 어색하기만한 우리 사회에 기부의 참 뜻을 전하는 듯 했다. 노은식 대표가 후원하는 학교는 주민 5.000여명이 생활하는 시골로 초·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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