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과 함께 비가 내렸다. 정처 없이 길을 나섰다. 딱히 용추계곡을 가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추적거리는 풍경을 따라 정처 없이 가다보니 안의면 상원리 덕유산(德裕山) 자락 입구까지 와 버렸다. 토닥거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푸른 계곡 길로 들어섰다. 계곡물은 돌 틈 사이사이로 길을 만들며 하얗게 흐르고 있었다. 어느새 좁은 숲길이 사라지고 넓은 하늘이 나왔다. 그리고 높은 터에 홀로 서 있는 기와지붕이 보였다. 목조 건물에는 ‘덕유산장수사조계문(德裕山長水寺曹溪門)`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4호인 용추사 일주문이라고 했다. 장수사가 왜 용추사 바뀌었을까. 신라 소지왕 때 각연대사(覺然大師)가 장수사를 창건하였다. 신라시대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을 비롯해 조선시대 무학(舞鶴). 서산(西山). 사명(四溟) 등 여러 고승이 수도한 이름 있는 절이었다. 지리산과 덕유산에 산재한 많은 사찰들을 말사로 두었으며 이곳 심진동(尋眞洞)에만도 열 개가 넘는 암자를 둔 대찰(大刹)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절집의 건물은 모두 불타버렸다. 오직 조계문만이 화마를 피했다. 그래서 장수사에 딸린 작은 암자를 중건하여 용추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계문은 숙종 28년에 만들어졌다. 굵은 원기둥을 세우고 버팀기둥을 앞뒤에 덧대었다. 그 위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그리고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가로질렀고. 공포(栱包)를 짜 올렸다. 공포는 조선 여인의 가채머리처럼 화려하고 무겁게 얹혀 있었다. 소의 혀처럼 생긴 쇠서는 마치 날아갈 듯 허공을 향해 너울거리는 듯했다. 가히 불타버린 장수사의 규모를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화려한 일주문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성(聖)과 속(俗)의 경계가 되는 산문은 왜 저리 화려한 모습으로 지어진 것일까. 속인을 산사로 유혹하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산사의 스님을 세상사로 유혹하려 했던 것일까. 처음 조계문 앞에 선 것은 이십대 초반이었다. 친정 가족들과 용추계곡으로 여름 나들이를 왔었다. 계곡에서 점심을 먹었고. 수박을 먹었다. 식사를 끝낸 형제들은 시원한 나무 밑에서 낮잠을 잤고 조카들은 수영을 했다. 그리고 나는 배가 아프다는 또 다른 조카의 손을 잡고 화장실을 찾아 조계문 앞까지 오게 되었다. 텅 빈 들판에 서 있는 조계문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절집이 있었구나’ 하며 그냥 휘 둘러 보았을 뿐이었다. 이글거리는 중천의 태양에 검은 모습으로 서 있던 일주문은 그해 여름이 끝나기도 전에 잊혀졌다. 세월이 흐르며 단청을 배우게 되었다. 단청을 하자면 문양의 이름뿐만 아니라 목조 건물의 구조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한국건축도 공부했다. 알고 나면 보인다고 했던가. 이십 년이 지나고 다시 장수사 조계문 앞에 섰다. 눈동자에 팔작지붕이 들어왔고 화려한 다포가. 햇볕에 씻겨 은은한 멋을 자랑하는 단청이 들어왔다. 오래 전의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조계문을 바라보았지만 그 화려함과 멋스러움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눈을 감고도 장엄함과 고풍스러움을 볼 수 있다. 배우고 익혀서야 사물을 보는 눈이 뜨였던 것이다. 사람에게는 ‘정신의 눈’이 있다. 이것이 먼저 열려야 보는 것을 바르게 보고. 듣는 것을 바르게 들을 수 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어른’이라 한다. 정신의 눈도 배우고 익히면 열릴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음이 열리면 정신의 눈 또한 저절로 열릴 것이다. 마음을 들여다본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욕심쟁이는 아닌지. 허영을 쫓아 겉모습의 화려함만을 추구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말은 보살인데 행동은 야차가 아닌지. 이 모든 속물의 성격을 다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갈 것이다.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 중요한 것은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어른에 가까워지고 있을지 모른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