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성균관 내 대성전 앞에서 기념촬영. 선비의 고을 함양에도 유교(儒敎)가정은 차츰 없어지고 서양문물이 토착화 되어 가고 있다. 향교의 옛 건물과 옛 풍습을 체험하는 관광함양을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향교도 차츰 서양화 현상을 가져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동방의 예의지국’이라고 하는 말이 있듯이 동방의 가정에 유교(儒敎)가 생활의 중심이었으나 지금은 서양문화가 더 몸에 젖어 있어 유교(儒敎)는 새로운 과목인양 신기하기도 한 것 같다. 요즈음 현대교육을 받은 학교 선생이 퇴직하여 장의로 추천되어 학생들을 예절교육을 시키고 있다. 이들도 더욱 새롭게 느끼는 것 같다. 전통교육의 맥을 이어 나갈 수 있는 곳으로 향교가 있다. 향교를 배우려면 성균관에도 가보아야 한다는 중론이다. 장의들은 많은 유적지는 가보았으나 성균관에는 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정경상 전교. 정문상 전총무. 서영효 재무장의 등 세분이 자비를 내어 대형버스를 준비하고 장의 부부와 여성현 직전 전교와 노재용 유도회장을 초청하여 지난 5월14일 성균관 견학 계획을 세웠다. 선비의 갈 길은 멀다. 배워서 알아야 내 마음속이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으니까! 남자들만의 선비가 되는 고유권한이던 시절은 다 갔다. 서양문화의 도입으로 부부동반 시대가 왔다. 언제나 없어서는 안 될 내조의 여왕 부인들을 잘 모시는 문화와 향교에 다니는 고충을 알리기 위해서 장의 부인을 대동하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5월14일 아침 6시40분에 유림회관에 당도하니 곧 관광버스가 출발할 것 같다. 나도 동석하였다. 함양읍을 뒤로하고 차안에서 정경상 전교의 인사말에 부인들에게 한 말씀 하기를 “향교는 우리가 살아가는 예절과 한문을 배우는 곳이니 남편이 향교에 가면 걱정하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아침7시 출발하여 오장택 운전기사의 능숙한 운전솜씨로 아무런 동요없이 11시 성균관에 도착했다. 선비의 고장 함양이라고 하는데 장의들은 새로운 문화에 잘 적응되어 선비의 내색이 없다. 언제 생색이 날지 성균관을 둘러보고 나면 선비라는 몸짓을 하려는지 묵묵히 성균관 들어서니 성균관 직원들이 우리를 반긴다. 우리는 옛 선조들이 공부하던 명륜당에 같다. 명륜당 앞에는 서원철폐령 신도비가 글은 다 지워지고 비석만 남아 당시의 처절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명륜당 좌우에는 유생의 숙소가 있다. 숙소를 보니 함양의 선조들도 이곳에서 공부했다는 것이다. 함양향교관내 조선 때 소과(진사. 생원) 218명. 대과는 84명 계302명이 합격하여 수학(修學)한 곳이다. 마당에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전체를 차지 한 듯하고. 부산향교에서 올라온 학생들이 도포와 갓을 착용하여 괴나리봇짐을 메고 과거 체험 행사를 하니 운치있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대성전에 갔다. 일두 정여창선생이 모셔져 있다하여 후손 정경상 전교. 정순경. 정문상이 유복을 차려입고 분향을 하였다. 이들은 남다른 감회를 느끼는 표정이다. 성균관 소속 황의욱 선생의 해설로 성균관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우리 일행은 비원에 있는 과거 시험장 영화루를 보고 고향버스에 승차하였다. 관광차는 서울을 빠져나와 함양을 향하여 내려오는 중 정경상 전교의 김삿갓 노래를 멋들어지게 선창했다. 문득 공자가 진(陳)·채(蔡)의 국경 근처에서 곤경에 빠져 양식마저 떨어지고. 제자들이 배를 곯고 있을 때. 공자는 두 기둥 사이에서 노래를 불렀다. 자로(子路)는 이 지경에서도 노래를 부르시니 그것도 예입니까?" 물었다. 공자는 "유(由)야! 군자가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교만[驕]을 없애기 위함이며. 소인이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두려움을 없애기 위함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우리는 무게를 잡아 폼을 내는가 보다 교만을 없애는 노래는 우리들에게 단합을 불러온 것 같다. 馬長鉉 유교신문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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