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도 여성을 알고 지낸지 벌써 15년인가 보다. 인도의 오로빌과 한국의 함양을 오가면서 삶을 챙기느라 어느 사이 나는 인도에도 집 한 채가 있고 오로빌에도 집 한 채가 있게 되었다. 이렇게 바다 건너 두 개의 집과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내 옆에 마리라는 인도 여성이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내 기억에 있는 인도에서의 생활이란 시장문화가 융성한 한국에서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나날이었다. 집안 수리를 위해 필요한 나사 하나를 구한다고 하루 종일 폰디체리 시내를 헤매야 했던 상황들이 비일 비재하였다. 무슨 일이든 진척을 하기 위해 한국보다 몇 배의 힘과 진을 소진해야 했었다. 더구나 여러 프로젝트들을 준비하느라 집에 와서도 밤늦게까지 컴퓨터 앞에서 일을 하곤 했었다. 그러하니 집안을 청소해주는 가사 도우미가 있다면 정말 힘이 되겠다 싶었다. 그렇게 해서 오로빌 주변의 인도인 마을에서 소개를 받은 사람이 ‘마리’였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3일 반나절 정도만 와서 집안 청소며 정원 물주기 등을 해주는 조건이었다. 마리는 당시 낮밤으로 술을 먹는 남편으로 인해 아이들과 당장 먹고 살 길을 찾느라 가사도우미(인도 용어로는 아줌마의 뜻인 ‘아마’)로 나섰다. 마리에게는 2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이 있었다. 순박한 눈빛과 미소를 가진 마리는 제법 몸집이 있긴 하나 투박하지 않은 말씨와 정이 깊은 에너지를 가졌다. 전형적인 인도의 수드라 계급 출신이어서 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 타밀인임에도 타밀어로 숫자 10을 넘겨서 쓰거나 세야 하는 상황이 오면 마리는 난해한 얼굴 표정으로 열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해서 표현하곤 했다. 마리는 연필을 쥐고 글을 써본 적이 없다. 영어는 물론이고 타밀어의 기본 낱글자조차 알지 못하는 문맹의 여성이다. 마리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나는 손가락을 사용하고 얼굴 표정을 구사한다. 결국 서로의 의사가 이것이겠구나 하고 감지될 때까지 우리는 한동안 판토마임과 같은 제스쳐를 하다가 웃음으로 마무리한다. 내 집에 처음 왔을 때 마리는 짚으로 엮은 지붕과 맨흙 바닥에 부엌도 없는 방 한 칸이 마리의 집이었다. 게다가 병든 남편과 아픈 큰 아들을 간호하느라 고된 눈물을 보이곤 했었다. 필자 역시 당시 두 아들을 키우면서 월급 없는 자원봉사 생활을 하는 터라 쉽지 않은 재정적 상황이었다. 그러나 6일 근무 전일의 노동 제공과 그 대가로 지급하는 고정 수입은 마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계 강구책이었다. 그렇게 해서 마리는 내 집의 전속 가사도우미가 되어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다. 15년이라는 세월을 지나면서 마리의 아이들도 나의 아이들도 장성하였다. 그 사이 마리의 남편과 큰 아들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작은 아들은 영어를 할 줄 아는 목수가 되어 있었다. 마리의 손녀 중 하나는 학교에서 의사 지망생으로 대학에 갈 것을 추천받았다. 지난 세월동안 조금씩 비축한 돈으로 마을의 맨 가장자리 끝에 집 지을 터를 얻었다. 이어 자재를 얻고 가족들이 합세해서 집 한 채를 번듯하게 지어내었다. 맨땅이 아닌 시멘트 바닥에 거실과 부엌과 3개의 침실방과 화장실이 따로 있는 집이었다. 마리의 초대에 응해 찾아갔더니 온 가족과 더불어 마리의 사촌 언니 식구들까지 와 있었다. 마리는 온 정성으로 내 옷을 받아 곱게 챙겨주고는 오렌지 주스 한 컵을 건네주었고 이어 물 한 컵도 건네주더니 이내 비스킷과 사과를 가지고 나왔다. 사과는 한국식으로 쪽 사과로 잘라 접시에 담아 내왔으며 이어 반숙으로 프라이한 계란(늘 내가 즐겨 먹는 계란 후라이 형태)을 내왔다. 이어 나를 위해 아침부터 준비했다는 치킨 비리아니를 내와서는 삿포르 삿포르 하면서 자꾸 권하였다. 나를 환대하느라 나머지 식구들은 나를 둘러싸고 앉아 있을 뿐 아무리 권해도 본인들은 나중에 식사를 할 것이라고 했다. 마리가 내 온 오렌지 주스와 물 한 컵과 비스킷과 달걀 반숙 프라이는 나를 위해 사려 깊게 준비한 마리의 특별 목록이었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준비할 수 있는 메뉴들이기 때문이다. 집 안의 구석구석을 내게 보여주는 동안 따스한 빛을 머금은 마리의 미소 안에는 지난 세월을 함께 해오면서 다른 누구하고도 맺을 수 없이 짙어져 버린 두 여인간의 단단한 우애가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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