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사는 곳에 멋진 풍경 중 하나가 ‘장항들’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펼쳐진 들, 그리고 그곳에 심긴 벼들은 참으로 아름답다. 장항들은 일 년에 몇 번씩 그 모습을 바꾼다. 겨울에는 검은색 흙과 간간히 내리는 눈으로 인해 흑백의 조화를 볼 수 있다. 이른 봄 논갈이로 가로 세로로 줄지어 선 흙, 늦봄이 되면 흙탕물로 가득한 논과 듬성듬성 심긴 벼들을 볼 수 있다. 여름이 되면 벼 사이로 보이던 논바닥은 사라지고 온통 초록색 양탄자를 깔아둔 것처럼 초록색 들판이 펼쳐진다. 가을이 되면 잎과 이삭은 노랗게 익어 황금 들판으로 변한다. 매일매일 변해가는 장항들판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하다. 그러나 아름답게만 보이는 들판이지만 개인적으로 봄의 들녘은 애처롭다. 봄이 되면 장항 들판에는 생명의 사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물로 가득한 논에 잎과 줄기의 일부를 내밀고 줄서 있는 벼의 모습은 마치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것 같다. 벼는 이렇게 이식된 다음부터 생명의 사투가 시작된다. 턱까지 차오르는 논바닥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벼는 마치 질식이라도 하듯이 며칠은 잎이 노랗게 변해 힘을 쓰지 못한다. 그러다 얼마 후에는 노란 잎에 생기가 돌며 푸른색을 찾아간다. 이런 모습을 보고 농부들은 “벼가 흙 내음을 맡았네!”라고 하신다. 우리 함양은 인구감소와 지방 소멸이란 고민에 빠져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관이 머리를 맞대고 많이 노력하는 것을 본다. 얼마 전 그 결실이 지방소멸대응기금 평가에서 최고 등급을 받아 사업비를 확보하기도 했다. 이런 경제적 부분도 있어야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좋은 삶의 자리를 만들 수 있느냐!’라고 생각한다. 삶의 자리는 돈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어느 정도의 자본도 필요하지만 “공감”과 “공간”이 우선 되어야 한다. “공감”을 필자의 말로 풀어 본다면 ‘자신의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감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공간을 내어 줘야 한다. 공간은 마음의 자리, 생각의 자리, 삶의 자리를 서로에게 내주는 것이다. 이미 함양에 사는 우리도, 함양에 살고 싶어 오는 사람도 서로서로 자신의 공간을 내놓을 때 우리는 함께 살 수 있다. 먼저 삶의 자리를 잡은 사람들의 불편함도 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이 없어도 지금까지 잘 살아왔어! 그런데 왜?”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앞으로다.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이란 문제 앞에서 관청이 인구 유입 정책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함양에 먼저 자리 잡고 살고 있는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럼 함양에 사는 사람들이 공간을 내어 준다고 해서 다 해결 될까? 아니다. 함양으로 삶의 자리를 옮기는 사람들도 자기 생각과 삶의 공간을 내어 줘야 한다. 자기 생각과 삶의 가치만을 주장하면 온전히 함께 살 수 없다. 땅은 언제나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 준다. 그래서 땅은 모든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준다. 우리는 모두 함양이란 땅에 기반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다. 단 ‘누가 먼저 함양 땅에 정착했느냐’란 순서의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함양 땅에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언젠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내가 살던 삶의 공간을 내주고 떠나야 한다. 함양은 참 좋은 땅이다. 벼가 좋은 땅을 만나 뿌리를 내리고 풍성한 열매를 맺듯, 우리 모두 함양 땅의 좋은 흙 내음 맡으며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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