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3.3년이다. 다른 OECD 국가 평균(81.0년)보다 2.3년 오래 살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환갑인 61세는 노인이 아니고 중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대한노인협회가 항의성명을 발표할 만큼 큰 사회적 이슈가 등장하였다. 바로 ‘적정 수명 80세’ 논란이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측 법률대리인이 연이어 페이스북에 쏟아낸 상식 밖을 떠나 망언에 가까운 언사 때문이다. 50대 초반에 불과한 필자도 너무 지나친 언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때 유행하던 노래 ‘내 나이가 어때서?’ 라는 노래가 무색하다. 요즘 코로나 방역지침으로 모임 제한 숫자를 발표하는데 그 근거가 미약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무슨 근거로 4인, 또는 2인을 내세우는지 뚜렷한 설명 없이 그냥 숫자만 발표한다. 이처럼 J변호사도 왜? 적정 수명이 80세이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혹여 성경에서 말하는 ‘사람의 수명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는 구절을 내세우는 것인지 아무런 이야기가 없어 답답하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 역시 ‘노혐’(노인 혐오)가 뿌리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노인들에 대한 혐오가 계속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 ‘늙어도 충분히 아름답고 고귀하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시대가 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펜을 잡았다. 노인 혐오의 극단을 보여주는 베르나르가 쓴 단편소설 〈황혼의 반란〉 있다. 한국처럼 초고령 사회가 된 프랑스에서 노인 배척운동이 일어난다. 학자들은 TV에 나와 사회보장 적자는 노인들 때문이라고 외친다. 대통령은 신년 담화에서 “노인들을 불사의 로봇으로 만들 수는 없다”고 선언한다. 곧바로 노인들에 대한 약값과 치료비 지급이 제한된다. 노인들을 붙잡아 가두고 독극물 주사를 놓아 죽인다. 그러자 노인들이 들고일어나 생존을 위한 게릴라 투쟁을 시작한다. 체포된 주인공 프레드는 죽기 전에 자신에게 주사를 놓는 자의 눈을 차갑게 쏘아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너도 언젠가는 늙은이가 될 게다.” 허구적 이야기로만 여길 게 아닌듯하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고려장’이라는 제도가 있었고 이 소설은 고려장을 연상케 한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마치 자기들은 평생 늙지 않을 것처럼 노인들을 혐오하는 젊은이들이 있다. “진짜 말투 개틀딱 같네 ㅋㅋ” “와~ 틀딱 냄새 진동을 하네” 같은 말을 쉽게 한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경로(敬老)’라는 말이 퇴색되고 그 빈자리에 조롱과 멸시, 혐오스런 표현들이 등장했다. 경로를 비꼬아 만든 ‘혐로(嫌老)’라는 단어가 버젓이 인터넷에서 통용될 정도다. 이제 이 사회에는 어른이 없다는 위기감이 감돈다. 하지만 노인 혐오에도 이유는 있다.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를 내고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노인들을 보면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다. 나이가 들었다고 다른 사람은 전혀 배려하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면, 좋은 소리 들을 수 없다. ‘꼰대, 나때’는 대표적인 부정적 표언이다. 그렇다고 노인들의 잘못된 행동을 트집 잡아 앙갚음하듯이 대들어서야 되겠는가. 이건 이것대로 고치고, 저건 저것대로 고치면 될 것이 아닌가. 현역 세대의 부담은 눈 감고 자기 연금만 욕심내는 어른들, 말귀 안 통하는 잔소리꾼 할머니들도 많다. 젊은이들의 표현이 거칠어서 그렇지 노인 혐오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은 분명 노인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들이 고쳐나가야 한다. 노인에 대한 공경은 기본적으로 노인의 윤리의식에서 시작된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 선생의 “노인 세대를 절대 봐주지 마라. 많은 노인 세대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하지 않고, 배워야 할 것을 하지 않고, 남한테 해줘야 할 것을 하지 않았다.”는 어록은 노인들 입장에서는 아프지만,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74세의 배우 윤여정씨는 특유의 탈권위적이고 솔직한 말투, 청바지를 즐겨 입고 캐주얼과 클래식을 오가는 그의 젊고 품격 있는 패션 스타일. 화려하진 않지만 열심히 쌓아올린 오랜 연기 경력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을 보고 젊은 MZ세대들은 그녀에게 환호성을 터트리며 빠져들었다. 아하, 이렇게 하면 늙어도 ‘혐로’가 아닌 ‘경로’의 대상이 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해답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노년들, 구약성경 욥기(32:6~9)를 명심할 필요가 있다. ‘어르신네들에 비하면 저는 한낱 풋내기입니다. 제가 무엇을 안다고 아뢰랴 싶어 황송하여 망설였습니다. 나이가 지긋이 들어야 할 말이 있고 연치가 들어야 지혜를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슬기란 사람 속에 있는 영이요, 전능하신 분의 입김에서 풍겨오는 것이더군요. 나이가 많다고 지혜로운 것도 아니고, 연로했다고 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제 노인들도 부단히 배우고 노력하여 젊은이들에게 존경과 아름다움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또한 될 수 있다. 우리 모두 화려하고 아름다운 노년을 준비하자. 노인은 충분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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