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만국의 언어’라고 말하는 사람(강형원)도 있지만 그 만국의 언어가 왜곡된 의도로 쓰이면 나쁜 권력이 된다. 보는 것은 읽는 것이고, 읽는 것은 배경지식(경험)을 바탕으로 분석과 통찰이 함께 하는 것이다. 사진을 촬영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앞뒤 정황이 어떠한지, 어떤 시간대에 어떤 곳을, 왜 찍은 것인지 피사체의 상황을 통찰하고 분석하는 사람은 렌즈의 의도에 쉽게 동조하지 않지만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과도한 감정을 표출하는 사람은 동조가 빠르다. 그 사이에 누군가가 억울해진다. 신문의 한 면을 장식한 특종사진이 어떤 위험을 야기했는지 퓰리처상을 받은 한 장의 사진이 잘 설명해 준다. TV 프로그램 <문제적 남자>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었던 “로안은 총으로 베트콩을 죽였지만 나는 카메라로 로안을 죽였다”는 에디 에덤스의 뒤늦은 사죄가 진실을 왜곡한 나쁜 권력이 된 사진의 사례다. 베트남전 때 찍은 에디 에덤스의 사진은 ‘무장한 군인이 선량한 시민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듯한 모습이지만 사실은 총구를 겨눈 로안은 남베트남의 장군이자 경찰청장이고 총구 앞에 선 사람은 베트콩으로서 벌을 받아야 할 나쁜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 사진 한 장으로 범죄자가 동정을 받고 존경받던 인물 로안은 용서받지 못할 악인이 되어 삶이 무너져버렸다. “세상의 드라마를 기록하다 ‘로이터 사진전’(2016)”은 렌즈를 통해 세상의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사진의 가치가 달라진다는 기획의도를 전면에 내세웠다. 세상에는 진실을 은폐한 나쁜 권력이 되는 사진도 있고, 렌즈의 초점이 올바른 방향으로 향한 사진도 있다. 로이터 사진전은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관객을 마주했지만 관객의 경험과 양식에 따라 수많은 사진들은 다양하게 읽혔을 것이다. ‘무엇을 담느냐’와 ‘무엇을 보느냐’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2005년에 2쇄를 발행한 최연구의 <르 몽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르 몽드는 사진을 거의 쓰지 않는 신문이다. 사진을 쓰지 않는 이유는 자칫 이미지나 스펙터클이 사건의 의미를 왜곡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립적이라기보다 독립적이며, 읽고 생각하는 신문을 위해 삽화, 만평, 카툰을 통해 메시지만 전달해주고 나머지는 독자의 이성적 판단에 맡겨 웬만해선 사진을 쓰지 않는다” 프랑스의 3대 일간지 중 하나인 ‘르 몽드’는 프랑스 지식인들이 그러하듯 자신과 다른 의견에 대해 정치적인 공격을 가하지 않으며 진실을 말하되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어떠한 권력에도 종속되지 않는 독립적인 언론관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런 언론관을 가지고 만든 신문은 독자의 무한신뢰와 지지를 받을 것이다. 최근 포털사이트에 등장했던 어떤 기사의 장난질 같은 ‘ㅋㅋㅋ’ 헤드라인과,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 어떤 기사의 캐릭터 사진은 언론에 대한 불신을 확장시켰다. 네티즌들은 지나치게 편향된 기사나 질 낮은 문장에 대해 SNS나 댓글로 사안을 분석하고 문제를 짚은 함축적인 문장으로 기사를 초라하게 만든다. 해당 언론사가 수준이 의심스러운 기사를 용인함으로서 자가당착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한 셈이다. 여전히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헤드라인과 사진은 이곳저곳에 종종 출몰한다. 그러나 생각있는 독자들은 그런 류에 냉소적이다. 렌즈든 글이든 피사체에 진실한 정연한 문장이 독자를 설득한다. 렌즈의 의도가 불순하면 쉽게 휘둘리는 독자도 함께 불순해진다. 본질·자질·본분·본말... 따위의 단어들과 얽혀 ‘보도윤리’의 의미가 무참하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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