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험해서일까? 말(言語)도 더 거칠어지고 더 강해지는 것 같다. 실제로 본인의 결백을 주장하거나 자신의 진정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함부로 맹세를 하거나 강하게 항변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그러나 누구든지 호언장담을 한다거나 큰소리를 치면서 아무리 맹세를 한다 해도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들은 연약한 존재일 뿐 아니라, 죄성(罪性)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그 어떤 말이라 할지라도 사실 믿을 것이 못 된다. 툭하면 ‘저는 교회 집사입니다. 교회 장로입니다. 교회 목사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교회 집사기 때문에 장로나 목사기 때문에 나는 틀림없는 사람이다!’라는 맹세다.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양치기 목동이 노상 양만 치다 보니까, 심심하기도 하고 재미도 없었다. 양치기 목동이 저 아래에 있는 마을을 향해 소리를 쳤다.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밭에서 일을 하다 말고 쇠스랑과 곡괭이와 삽을 들고 산으로 쫓아 올라왔다. 헐떡거리면서 뛰어오는 마을 사람들을 본 양치기 소년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마을 주민들을 골탕 먹인 것이 재미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 다음부터는 심심할 때마다 소리를 쳤다. 양치기 소년이 소리를 칠 때마다 동네사람들은 일손을 멈추고 헐레벌떡 산으로 뛰어올라 왔다. 나중에 거짓말인 걸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양치기 소년을 나무라며 꾸짖었지만, 양치기 소년은 배꼽을 잡고 웃을 뿐이었다. 이번엔 경상도 사투리로 또 소리쳤습니다. “넉대가 나타났다! 넉대가 나타났다!” 이번에도 동네 사람들이 일을 하다 말고 곡괭이와 삽을 들고 산으로 뛰어 왔다. 그런데 늑대는커녕 토끼새끼 한 마리도 보이질 않았다. 화가 난 동네 사람들이 왜 거짓말을 했냐고 야단을 쳤더니, 양치기 소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동네 이장이 나서서 양치기 소년에게 호통을 치면서 말했다. “야, 이 못된 놈아! 늑대가 나타났다며? 도대체 늑대가 어디 있단 말이냐? 너, 자꾸 거짓말을 하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그랬더니 양치기 소년이 깐죽거리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내가 언제 늑대가 나타났다고 그랬어요? 넉 대가 나타났다고 그랬지! 아까 정말 비행기 넉 대가 저쪽에서 날아왔다고요! 한 대, 두 대, 세 대, 네 대... 모두 넉 대의 비행기가 나타났단 말예요! 그래서 ‘넉 대가 나타났다! 넉 대가 나타났다’ 그런 거라고요!” 결국 진짜 늑대가 나타났을 땐 아무도 믿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번엔 진짜다! 나를 믿어 달라!’라고 외쳐 봐도 아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맹세도 한두 번이지, 몇 번 겪어 보면 다 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왜냐하면 맹세라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이 할 게 못 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까딱없다? 그것도 헛된 맹세일 뿐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해서 예수님의 칭찬을 한 몸에 받았던 베드로조차도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뭐라고 했던가?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반박했다. 예수님께서 다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맹세하며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불과 몇 시간 후에 베드로는 서슬 퍼런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다. 그렇게 뜨거웠던 맹세는 다 어디로 간 걸까?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것이 민망해지자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을 걸고 맹세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자기 머리를 걸고 맹세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도 말고 땅으로도 말라!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거룩한 곳이기 때문이다! 더 나가서 자기 머리를 걸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다. 누가 염려함으로 자기 키를 한 자라도 더 크게 할 수가 있겠는가? 누가 염려함으로 자기 머리카락 한 개라도 검고 희게 할 수가 있을까? 자기 몸 하나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 자기 머리를 걸고 맹세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맹세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이면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자기 과시를 위한 허풍이다. 일종의 방어기재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도 삼가야 한다. 맹세하는 두 번째 이유는 악한 의도를 가지고 사기를 치기 위한 맹세다. 이건 정말 명백한 범죄 행위다. 그렇게 봤을 때 차라리 숫기가 없어서 말 한 마디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보면 그게 더 낫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고 사람들 앞에서도 그렇고 괜히 맹세한답시고 떠벌여댔다가 망신만 당하는 일은 없어야 겠다. 대선 경선을 앞둔 정치권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싯귀가 있다. “말로서 말 많으니 말 많을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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