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 이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애국심 좀 있다 내세울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위인이다. 하기사, 김 사령관이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데 큰 효과를 보여주는 무력 투쟁의 선봉장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일제의 간악에 맞서 싸우고, 통쾌한 승리를 거둔 명장을 어느 누가 부정적으로 바라보겠는가? 그렇다, ‘만약 위 서술과 역사 속 김좌진 장군의 일생이 완벽히 부합했다면’ 이라는 가정 하에서 그렇다. 안타깝게도, 혹은 충격적이게도 김좌진 장군의 독립운동 활동과 최후까지의 과정은 모든 것을 고려해도 티끌 하나 없이 떳떳하게 공표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청산리 전투의 영웅, 독립군 사령관, 이러한 명예로운 직함은 후대의 과장이 어느 정도 가미된 것을 제외하고는 김좌진 장군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그런데, 독립운동은 당연히 많은 자금이 요구되는 법, 그러므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는 돈을 모으고 불릴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이 택한 방법은 마왕 김좌진을 탄생시켰다. 마왕, 어쩐지 뜬금없는 말이지만, 실제로 만주 한인 이주자들은 김좌진을 마왕이라 불렀다. 이 배경에는, 김좌진 진영의 악명 높은 재산 갈취와 횡포가 버티고 있었다. 그들은 폭력과 강압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만주 사회의 조선인들을 지배 아래 두고 보호금, 독립운동 협회 회비라는 명목으로 여러 군과 마을에서 지속적으로 금전과 재산을 확보했다. 사건은 시작은 이러했다. 1925년 3월 10일, 영안현에서 대한독립군단 대표 김좌진, 남성극 재건 대한군정서 대표 김혁, 조성환 등이 북만주의 지역대표들과 함께 모여서 수일간의 협의 끝에 3월 15일에 통일된 독립운동 단체로 신민부를 창설했는데, 얼마 뒤 일제의 신민부 본부 습격 이후 이를 신민부 소속의 인물들이 수습하는 과정에서 적극적 무장투쟁을 주장한 군정파와 민중본위의 자치를 주장한 민정파로 분열되었다. 군정파는 김좌진 장군이 위원장이었고, 군정파는 1927년 5월 김좌진을 위원장으로 하는 지도부를 편성하여 영안현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들의 군사적 급진성으로 인해 비극은 마침내 그 불씨가 붙여지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특정 지역에서 활동할 경우, 그 지역 주민들에 대한 배려가 당연히 필요하다는 것을 간과하고, 가난한 재만 조선인들에게 군자금과 회비를 요구했다. 그러다가 이러한 요구들에 지친 빈주현 주민들이 신민부 탈퇴를 결의, 이를 신민부에 통보한다. 그러자 신민부 군정파는 얼마 후, 신민부 탈퇴 이후의 생활 관련 대책을 세우던 빈주현 주민 40명이 모인 회의 자리를 습격, 그들을 총으로 쏴 죽이는 범죄를 저질렀다. 이 사건은 동아일보에도 실렸으며, 이 일로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 동포들에게 김좌진은 공포의 대명사로 남았다. 그리고 결국 이 일이 만들어낸 앙금으로 김좌진이 암살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 현대 사학계의 주류 의견이니, 여기서 우리가 인과응보의 현실성을 어찌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경각심이 나타나는 부분이다. 방향성이 어긋난 독립운동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보여준 이 사건을 교훈삼아, 현재 우리는 이들과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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