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상륙작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맥아더(Douglas MacArthur)장군은 “너는 너의 믿음만큼 젊고 너의 의심만큼 늙으며, 너의 희망만큼 젊고 너의 절망만큼 늙는다”는 좌우명(座右銘)을 책상 앞에 새겨두었다. 믿음과 희망은 젊음으로 나를 이끌고 가지만, 의심과 절망은 나를 쇠하고 늙게 한다는 맥아더의 신념이었다. 맥아더에게 희망은 언제나 절망에게 “공존의 오용”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며 살아온 횟수만큼이나 경험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가진다. 노년의 축복이다. 가령 대장장이는 쇠붙이를 불에 달궜다가 물에 담궜다를 반복하고 반복한다. 그것도 모자라 큰 망치로 후려친다. 이렇게 불과 물로 담금질과 후려침이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쇠붙이는 마침내 값진 연장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비로소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도구로 태어난다. 인고(忍苦)의 세월인 시간과 신념의 삶인 하루는 언제나 함께한다. 값진 유익은 고된 세월과 함께 성장한다. 공존(coexistence)이다. 공존은 共(한가지 공), 存(있을 존) 즉, 서로 도와서 함께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경험을 한다. 때로는 그 경험들이 나의 생각과 삶을 바꾸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는 경험을 통해 또 다른 것들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이런 판단의 기준점을 지각심리학(知覺心理學)에서는 “준거틀(Frame of reference)”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다른 말로하면 “가치관(sense of value) 혹은 신념(belief)”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무엇이 좋고 나쁜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또한 무엇이 바람직한 것인지 판단하는 관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은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 생각한다. 나만은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자신은 퍽 괜찮은 사람이라는 신념을 형성한다. 신념은 한문으로 풀면 信(믿을 신), 念(생각 념)이다. 굳게 믿어(信) 변하지 않는 생각(念)을 말한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이순신 장군이나 3.1운동의 유관순처럼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심지어 목숨과도 바꾸며 자신의 생각과 나라사랑의 뜻을 굽히지 않고 그 신념을 이루고야만다. 그런데 이런 신념, 가치관, 준거틀을 잘못 사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오용(誤用)이다. 오용은 “잘못 사용한다”는 뜻이다. 돈을 절약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런데 부정적 의미로 해석하면 지나치게 인색한 사람, 구두쇠(miser)가 된다. 절약의 오용(誤用)이다. 인생을 유쾌하게 사는 사람을 부정적 의미로 해석하면 철이 없어 짓궂은 장난을 즐기는 사람, 개구쟁이가 된다. 유쾌함의 오용(誤用)이다. 논어(論語)에서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하였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즉, 신념은 잘 사용하면 큰 힘이 되고, 길이 되지만, 오용하면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봐야할 것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벽이 되는 것이다. 어느 날 우리에게 불쑥 찾아온 코로나19 역병(疫病), 생태계 변화, 온택트(ontact) 사회, 고령화와 저출산, 등 저변의 문제들은 공존이라는 이름으로 이제 우리의 옆자리를 차지고 앉아있다. 코로나19라는 미물(微物)이 주는 교훈이다. 혹자는 배움은 “자신을 열고 흔드는 일”이라 하였다. 나의 교만과 편견은 오늘도 이웃과 사회 속에서, 생태계와 역사 속에서 공존을 향하여 흔들려야 한다. 나는 여기서 무릎을 “탁!”하고 친다. 자연은 언제나 인간에게 “공존의 오용”을 허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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