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월 초가 되면 어김없이 언론에 등장하는 소식이 있다. 어떨 때는 별 일 없는 듯이 지나가 버리기도 하고 가끔씩은 여러 곳에서 아쉬움이나 부러움을 담은 반응이 일기도 한다. 바로 노벨상이다. 이 상은 자연과학 3분야 (물리, 화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 경제학 분야에서 인류에게 공헌도가 높은 연구 주제를 이끈 연구자들을 분야 별로 최대 3명씩 선정해 발표한다. 상금은 900만 크로네 (약 12억7000 만 원) 정도로 엄청난 액수이기는 하지만 이 상이 갖는 권위와 명예로 비추어보면 많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초로 북한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평화상을 수여한 이후에는 과학 관련 노벨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때마침 일본에서는 많은 과학상 수상자가 탄생함으로써 우리에게는 큰 부러움이 되기도 했다. 사실 해마다 벌어지는 10월의 이벤트가 벌어질 때 먼저 많은 사람들이 왜 일본은 벌써 24명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한 명도 나오지 않는가에 대해 많은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가 너무 없었다느니, 암기식 교육의 한계라느니 등등이다. 이 상황에서 MB 정부는 지원을 크게 늘림과 동시에 가능성 있는 그룹에 재정을 몰아주는 방법을 선택했다. 즉 지역별로 실적이 좋은 연구자들을 선정해 그들 중심으로 그룹을 만들게 하면서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인 것이다. 선거에서 과거에 자주 등장했던 ‘될 사람을 밀어주자!’를 연상케 한다. 이것은 여러 주제에 대해 다양한 방식의 연구의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면서 노벨상에 맞춘 선택과 집중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론적으로 참 한심한 방법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노벨상이 나온다면 지금과 같은 권위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의 우승국들은 축구를 잘 하는 엘리트들만을 선별해 선수로 키운 것이 아니라 사회 체육으로서 어린 아이들이 어디서나 공을 문화 속에서 그 힘이 길러졌고 그 결과물로 나타난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어쨌든 노벨 과학상을 수상하려면 기존의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달리 하면 노벨 과학상이 그렇게 중요한가 하는 점이다. 지금까지 노벨 과학상 수상자는 매우 많다. 첫 수상이 시작된 1901년부터 대략 30년은 근대의 시기를 넘어 인류의 정신이 새롭게 틀을 세우는 과학혁명의 시기였다. 당시의 수상자들은 물리학의 경우만 해도 아인슈타인, 보어,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디랙, 파울리, 보른, 퀴리 부부 등으로 과학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노벨상이 아니더라도 현대를 지배하는 위대한 과학자로 기억할 수밖에 없다. 100여년이 훌쩍 지난 최근 3~40년 사이 노벨 과학상을 수상한 과학자는 대략 300명 정도 될 것을 추정된다. 그 중 물리학상 수상자도 100명 정도 될 것이다. 그런데 물리학자인 필자마저도 이름을 기억하는 물리학상 수상자가 몇 명 되지 않는다. 지금의 과학은 100여 년 전처럼 인류의 과학적 틀을 새로 세울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더욱 철저히 자본에 종속된 과학 연구들은 기술문명에 기여하는 연구자들 중심으로 가치가 정해진다. 지금 어느 대학에서도 인류가 오랫동안 풀고자 했던 근원적인 문제들을 붙들고 씨름하는 연구자들을 교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중요한 교수의 임용 조건은 연구비를 쉽게 받고 결과물을 빨리빨리 만들어낼 수 있는 분야의 사람인가이다. 그러니 어느 누가 근원적인 문제들에 매달리겠는가? 지금 물리학만 봐도 풀어야 할 근본적인 문제들이 널려 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그 문제에 도전하기는 불가능하다. 중요한 문제들을 평생 붙잡을 수 있는 연구자들이 줄어가니 매년 노벨 과학상을 주기에는 그 대상이 자꾸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 기억에 남는 수상자는 드문 것이다. 이제는 노벨상에 집착하여 엘리트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몰아주는 짓을 그만 두어야 한다. 생존의 위기에 내몰린 인류를 위해 과학자는 지금 노벨상 수상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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