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할 듯 말 듯 안하니 괜히 불안하다. 십년 째 우리 집에서 곶감을 깎아주시는 절터댁이 며칠 전부터 “내가 조용히 할 말이 있는데...” 하며 뜸만 들이고 좀처럼 말을 안 하시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시려고 그러시나 싶어 궁금해졌다. 혹 뭔가 섭섭한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시나? 나는 살짝 안달이 나고 은근히 걱정도 되었는데 오늘 점심을 먹으며 드디어 말을 꺼내셨다. “인자 내가 박스를 못 드니 내년에는 날 안 부를 끼가? 내가 이래 물어보는 거는 다른 게 아니고 만일 내년에도 날 부르면 다른 집서 아무리 불러도 못 간다고 말하려고 카는 말이야~”( 이래봬도 날 스카우트 하려는 집들이 아직은 많이 있으니까... ) 매년 곶감 철이면 우리 집에서 겨울 한 달 동안 감 손질을 해주시는 절터댁이 이번에 무거운 감박스를 척척 들어 올리고 일 잘하는 놉을 보고 처음에는 사람 잘 구했다고 반색을 하시더니 어느 순간 이러다가 내 일자리 뺐기는 거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드신 모양이었다. 연세가 칠순보다 팔순이 가까우시니 괜히 하는 걱정은 아니다. 역시 십년 째 자동박피기로 감을 깎아 주시는 자리댁도 내일이면 필순이신데 감 깎는 거 하나는 아직도 엄천골 챔피언이시다. 나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하루에 30접(3000개)를 깎기 힘든데 무려 50접을 거뜬히 깎아내시는 선수이시다. 다만 이제는 무거운 감 박스를 들고 옮기지 못하시니 옆에서 누군가가 일일이 감 박스를 손이 닿는 곳에 옮겨주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기에 아마도 같은 처지의 두 아지매 사이에 그러한 말들이 오갔을 것이다.(만일 유진국이가 내년부터 감 깎으러 오라고 부르지 않으면 니캉내캉 아무개 집에 가서 일을 하면 된다. 걱정할 거 항 개도 없다.) “그럴리가요~ 아지매~ 내년에도 저희 집에서 감깎아 주이소~ 박스 드는 거야 올해처럼 힘쎈 놉을 구해서 쓰면 되지요. 다른 집에 가지마시고 우리 집에서 해주이소~” 나는 이렇게 말은 했지만 아지매들 나이가 나이니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엄천골에서 곶감을 깎은 지가 십 오년은 되었는데 그동안 우리 집에서 곶감 일을 도와준 사람 중 세상을 버린 분들이 열 손가락이 넘는다. 시골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의 연령대가 그만큼 높은 것이다. 이제는 일을 그만하고 손자들 재롱이나 보며 노후를 보내셔야할 나이들인데 일손을 놓지 못하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나는 올해 운 좋게도 장미란을 스카웃하게 되어 허리 접히는 곶감 일을 허리 펴고 하고 있다. 하지만 올해의 행운이 내년에도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다. 그리고 챔피언 장미란이 내일 당장이라도 더 좋은 보수를 주는 곳으로 스카웃되어 가버릴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나는 오늘 당장은 힘세고 성실한 손을 만나 허리 펴고 어깨 힘 빼고 즐겁게 곶감을 만들고 있다. 나는 오늘의 이 사소한 행복을 붙들고 싶은 마음에 일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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