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책이 예정대로 곶감 출하시기에 맞춰 나왔더라면 어떤 식으로든 곶감 홍보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고두고 읽히는 책을 만드는 출판사의 방침 때문에 책이 언제 나올지는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다음 주에 나올 것 같았는데 그 다음 주로 미뤄지고 월말에는 나오겠지 했는데 다음 달 초로 미뤄졌다. 하지만 내가 용을 쓴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두고두고 읽히는 책을 만들려고 하는데 내가 괜히 재촉해서 얼렁뚱땅 한번 읽다 던져지는 책이 만들어지면 안 되겠기에 나는 말없이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우리 집 새 식구가 된 어린 길냥이 수리는 두 배 세 배로 커지고 얼굴이 돼지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도 기다림의 끈을 놓아버렸다. 나는 책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곶감 포장에만 집중했다. 다행스럽게 올해도 곶감은 맛나게 잘 만들어져 고객 반응이 뜨거웠고 포장을 제때 못해 배송이 지연될 정도였다. “고객님~ 기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내일은 꼭 보내겠습니다” “칭구님~맛있게 드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추가 주문하신 곶감은 모레까지는 꼭 보내드리겠습니다. 배송이 지연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출판사에서는 팔리는 책을 만들려고 하고, 저자는 좋은 책을 만들려고 한다. 이게 정상이다. 근데 어찌된 일인지 출판사와 나는 역할을 바꾸어 연기를 하고 있었다. 출판사에서는 (두고두고 읽히는) 좋은 책을 만들려고 애쓰고, 농부는 빨리빨리 만들어 농산물 판매에나 도움이 되기를 바랬으니 말이다. 사실 내가 건넨 원고는 매끈하지도 못했다. 이걸 독자가 편하게 읽을 수 있게 출판사에서 하나하나 부드러운 표현으로 손을 보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출판사에서 내가 쓴 글의 행을 바꾸고 순서를 바꾸어 놓으니 평범한 산문이 거의 시적인 표현으로 변신했다. 거친 돌멩이를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은 매끈한 몽돌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명절은 설도 있고 추석도 있지만 곶감은 설 명절이 대목이다.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출판이 다소(상당히) 지연되기는 했지만 아무리 늦어도 대목 전에는 될 터였다. 디자인, 교정, 편집은 거의 다 된 듯했고 대목까지 시간은 충분했다. 그런데 그건 내 생각이었다. 맛난 곶감을 만들려면 숙성기간이 꼭 필요한데 책도 마찬가지로 숙성기간이 필요했다. 곶감 숙성은 장인의 노하우가 필수다. 그냥 달력이 숙성시키는 게 아니다. 곶감을 만들어 “이거슨 꼬깜인가 꿀단진가?” 하고 자랑질하려면 제대로 된 기술로 숙성을 시켜야하는데 (구체적인 방법은 영업비밀이라 더는 이야기 할 수 없고), 책도 오랜 경력의 출판인만이 아는 숙성 기술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내가 기대했던 대목 출판도 되지 않았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 밖에 없었다. 하나는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는 것. 또 하나는 출판사에 떼를 한번 써 보는 것.
나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실행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비우고 떼를 써 본 것이다. 떼를 썼더니 (아니면 말고), 거짓말처럼 바로 책이 나왔다. 제목 ‘흐뭇’, 부제목 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지리산 농부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 아래는 저자 소개 글.
“인생 후반기를 자연 속에서 살고 싶어 2002년 지리산 엄천골로 귀농했다. 농부로 살아남기 위해 토종벌도 치고 된장도 만들고 벼농사 알밤농사 등등 안 해본 농사가 없을 정도였지만 수업료만 톡톡히 내고 연달아 실패의 쓴맛을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곶감을 만들어 팔면 술도 한잔할 수 있다는 이웃 영감님의 꼬임에 빠져 십 수 년째 곶감을 만들고 있다. 십여 년의 시행착오 끝에 지금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곶감을 만들어 술도 한잔씩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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