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내와 함께 집 근처 산을 산책했다. 온 산이 봄을 머금고 나무들은 겨우내 드러냈던 속살을 연녹색의 새싹으로 옷을 입기 시작했다. 계곡 여기저기에는 진달래, 산수유, 생강나무, 버들강아지를 비롯해 미쳐 이름을 불러주지 못한 나무의 새싹과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피어나는 꽃과 새싹이 예뻐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폰에 사진으로 몇 장 담았다. 그런데 문득 “꽃은 왜 필까?” 하는 엉뚱한 질문이 뇌리를 스쳤다. 사람들은 흔히 “열매”라고 말한다. 정말 열매가 목적일까? 나무는 자신의 자리에서 주어진 삶을 위해 “눈”을 준비한다. 이 눈은 “꽃과 새싹”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무관심하게 지나친 나무들도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친다. 나무는 일 년 전부터 세 종류의 “눈”을 준비한다. “꽃눈”, “잎눈”, “숨은눈(휴면아休眠芽)”이다. “꽃눈”은 자라 열매가 되어 또 다른 나무로 자라게 되고, “잎눈”은 싹을 틔워 잎과 가지가 되어 더 자란다. “숨은눈”은 나무가 위기 앞에서 발아한다. 나무의 원줄기나 가지가 잘릴 때 나무속에 숨어있던 “눈”이 싹을 틔워 가지와 줄기로 자란다. 나무는 “잎눈”을 준비하며 나무의 성장을 준비하고, “꽃눈”을 통해 또 다른 나무를 준비하고, “숨은눈”을 통해 나무의 위기와 죽음을 준비한다. 이런 나무의 생명력과 신비 앞에서 겸허하게 우리를 돌아보며 삶을 배운다. 나무를 지켜보며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준비’가 있어야 ‘꽃과 열매’를 볼 수 있다. 지금 우리 삶 속에 피어난 꽃과 맺힌 열매는 최소 몇 개월, 몇 년, 몇백 년 전부터 준비되고 시작된 것이다. 이 말은 개인과 사회가 누리는 아름다운 꽃과 달콤한 열매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쁜 꽃과 달콤한 열매만 즐기고 먹기만 한다면 다음 세대에게는 더 이상 꽃과 열매는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삶의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둘째, 준비는 나와 너를 위한 균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나무는 내일을 준비하며 자신과 타자 사이에서 어느 하나의 일방적 희생을 요구하지 않았다. 자신의 성장을 위한 잎눈과 번식을 위한 꽃눈을 적절하게 준비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어떤가? 자녀들의 성장과 성공이란 이름 앞에서 부모들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희생을 미덕처럼 생각한다. 오해 없기 바란다. 부모들의 희생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단 이런 희생과 헌신에는 부모가 이루지 못한 것을 자녀에게 투사하고, 자녀를 통해 대리만족하려는 욕구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런 관계가 결코 좋은 결말을 가져오지 못한다. 백 세의 삶을 말하는 이 시대에 부모는 자신의 삶과 꿈을 위해 작지만 진지한 노력과 투자가 있어야 하고, 자녀는 자녀의 삶과 꿈을 위해 달려갈 수 있도록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다. 셋째, 유한을 기억하고 영원을 준비하는 삶이어야 한다. 언젠가 나무의 원기둥이 잘린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여린 새싹을 본 적이 있다. 나무는 이런 순간을 위해 ‘숨은눈’을 준비했다. 우리의 삶도 동일하다. 이 땅만을 바라보며 꿈꾸고 자신을 성장시키는 삶이 아니라, 어느 순간 삶의 몸뚱이가 잘리는 상황과 삶의 끝에서도 새로운 생명의 싹을 틔울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이런 삶은 인생의 유한함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하늘의 영원을 사모하는 삶에서 온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댓글0
로그인후 이용가능합니다.
0/150
등록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이름 *
비밀번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복구할 수 없습니다을 통해
삭제하시겠습니까?
비밀번호 *
  • 추천순
  • 최신순
  • 과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