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에는 1922년생으로 실려 있어. 22****-192****이 내 주민등록번호야. 옛날에는 새벽닭이 울어야 새날로 쳤으니까 22년생인데 실제 태어난 시간이 새벽 두 세시쯤 됐다고 하니 23년생인 셈이지... 일제강점기를 살았고 6.25를 겪었다. 초근목피로 연명했던 보릿고개도 생생하다.” 백전면 백운리 하조마을 김형보(金炯甫‧97) 옹은 천수(天壽‧10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주민등록번호는 물론 태어난 시간과 번지수까지 또렷이 기억한다. 휴대폰 통화는 물론 문자까지 주고받는 신세대다. 하조마을에서 태어나 평생을 하조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살면서 성균관유도회와 관련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다. 2년 전부터 허리통증이 나타나 기력이 많이 떨어지긴 했으나 유도회 행사가 있는 날이면 가끔 읍내 유림회관에 들러 회원들을 만나곤 한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성균관 함양유도회 회원 중에서는 최고령이다. 천령대동회(현 천령경로당) 회장을 7년이나 지냈다. “지금은 회장이라고 하지만 그땐 ‘계장’이라고 불렀다”며 “천령대동회는 함양군내 읍면을 대표하는 유림들이 모인 친목단체로 지역발전을 위해서도 많은 일을 했다”고 한다. 그는 오랫동안 향교와 서원 등에서 장의(掌議), 유사(有司) 등을 맡아 봉사했다. 함양유도회에서는 존성계장(尊聖契長)을 지내기도 했다. 함양향교에서 장의를 3년간 맡았고 수동면 소재지에 있는 화산서원과 효리 구천서원에서 각각 3년 동안 예임유사를 지냈다. 뿐만 아니라 향교‧서원 등 석전제에서 아홉번이나 초헌관으로 제례를 올렸다. 유림회 활동 외에 특별히 관직을 지낸 적이 없는 그로서는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그의 덕망과 인품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 증표로 춘추기석전제를 알리는 망지(望誌)를 줄줄이 꺼내 보인다. 망지는 장롱 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함양향교를 비롯해, 수동 화산(華山)서원, 구천서원, 거창 하산(霞山)서원에서 봉행했던 석전제 망지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표창과 상장, 교육 이수증 등에서 90평생의 삶을 오롯이 엿볼 수 있다. 김 옹은 성균관유도회 교육에도 열성적이었다. 성균관에서 주관한 ‘31기 진사반’을 수료(1997년)하고 2006년 여든을 넘긴 나이에 성균관 전인(典仁) 자격으로 서울에서 열린 전교‧임원 연수를 다녀왔다. 그는 말총으로 만들었다는 관(冠)를 머리에 쓰고 “진사반 수료 기념으로 받은 것”이라면서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다”며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그는 12살 늦은 나이에 마을서당에서 천자문을 익혔다. 소학과 명심보감 등을 두루 섭렵했다. 주 로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했다. “지금 동사(洞舍‧마을회관) 자리에 서당이 있었다”며 “상조마을과 하조마을을 합쳐 백운마을이라고 하는데 상조에는 서당이 없어 상조마을 아이들도 하조서당에서 같이 공부했다”고 한다. “지금은 가구수가 많이 줄었지만 그 때만해도 하조마을만 50가구가 넘었고 상조마을과 합치면 100가구가 훨씬 넘었다”고 했다. 자신이 소유한 농지가 없었기에 농지를 빌려 한창때는 15마지기(3000평)까지 벼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변변한 기계가 없었던 때라 농사일은 지금보다 몇 배 힘들었다. 수확량도 많지 않았다. 그마저 반은 땅주인에게 소작비로 나눠주어야 했다. 20살이 되던 해 아랫마을(동백) 16살 아가씨와 혼례를 올렸다. 김 옹은 아내와 73년을 동고동락 했다. 슬하에 1남 8녀를 두었다. 3년 전에는 아내도 그의 곁을 떠났다. 이제 며느리가 원로하신 시아버지를 보필하고 있다. “우리 며느리 같은 효부도 없다. 손자 손녀들도 며느리를 본받아 참 잘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김형보 옹은 “서로 사랑과 덕으로 의지하며 살고, 말을 내뱉기 전에 세 번을 신중하게 생각하는 삼사일언(三思一言)을 실천하면 세상이 온화해 진다”는 말로 긴울림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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