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편에서 흩어져 나온 작은 돌풍들이 사나운 춤사위로 나지막한 소나무가지들을 하염없이 휘감아 돈다. 미세먼지까지 껴안고 돌아치는 바람 기운에 바깥출입도 삼가야 하는 안타까운 봄날이다. 10년 전만 해도 한국의 봄은 따스하게 초록빛이 움터오는 창창한 한가함으로 행복에 겨워했었다. 요즘엔 우연히 접한 이광수님의 백년 지난 저서들을 읽고 있다. 일제 강점기로 들어서는 1900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신문학의 지평을 여셨던 이광수님은 비록 후반기 친일 행적의 오점이 있긴 하였으나 그분의 문학 속에는 오롯하게 일관하신 위대한 정신이 스며있음에 새삼 눈이 떠진 계기가 되었다. 당시 정신계 기조였던 반봉건과 계몽주의에 이광수님의 문학은 그 필두이자 거두로 지칭되고 있으나 문학 기저에 깊이 깔려 있는 그분의 철학과 실행의 모티브는 시대정신을 훨씬 초월하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정신이었다. 즉, 사람과 만물을 향하여 지극 성심으로 ‘모심과 살림’에 임함이었다. 그 분의 생애를 잠깐 살피니 필력으로써만이 아니라 평생 모심과 살림을 매일의 일상에서 살아낸 흔적들이 무수하다.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의 내용 이곳저곳에는 그 분이 실제의 자기 삶에서 겪어낸 자신의 정신적 성장에 관한 이야기들이 솔직하게 풀어져 있는가 하면,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기실은 개체로 분리된 개별이 아닌 하나의 일체임을 성찰하는 깨달음의 순간들을 필력으로 포착해낸 내용들도 녹녹하다. 이렇게 이광수에게 푹 빠져 있는 필자에게 법정스님의 글 ‘무소유’가 카톡으로 날아들었다.애지중지하게 키워왔던 난초가 자신의 나그네 길에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알아차린 후, 난초에 대한 자신의 집착을 피력하면서 그 집착의 괴로움, 소유로부터의 난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해탈) 무소유를 표명하셨던 글이다. 그 난초를 난초처럼 말없는 친구의 품에 선뜻 안기어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소유함이 모든 괴로움의 원죄적 난관이니 이 소유에서 탈하는 법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음에 이름이라 하면서 무소유를 설하시는 법정스님의 1970년대 글에서 나는 논리(Logic)의 와전을 발견했다. 이 세상 만물의 하나로 태어나 이렇게 삶을 영위하고 고도의 정신작용까지 자유자제로 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그 정미한 진화에 이르기까지는 무수한 만물의 소리없는 살림과 모심의 작용에 그 은혜를 입지 않은 바가 없는데... 법정스님은 이를 ‘소유’라는 간단한 명제로 치부해 버리고 있음이었다. (필자가 잘못 읽었다면 머리숙여 용서를 구합니다!) 모든 생자가 소유됨과 소유함으로의 인연 속에서 생을 영위하고 있을 진대, 즉 소유다 무소유다의 명제/반명제의 논리로 갈림을 할 일이 아니었다. 모든 존재들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소유될 수가 없음이 우주적 존재로서의 기정사실임에 다만 나와 또 다른 나로 연결되고 있는 이 존재적 관계망(network/connectedness)안에서 무소유로서 버림을 택함이 아니라, 모심과 살림으로서 끌어안음을 택할 일임을 이광수님의 견덕에 힘입어 되새김질되는 것이었다. 애꿎게도 난초는 무소유라는 이름으로 하여 난초같이 말없는(무소유를 읍하지 않는) 자에게 이사를 가야만 했겠다 싶었다. 100년이라는 세월의 다리를 건너 이광수님의 삶과 정신에 빠져 볼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원을 관리하면서 호미질을 하는 나의 오전 시간을 사나운 봄바람 탓으로 하여 집밖을 나가길 자제한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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