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 새 학기에 학교를 옮겼습니다. 4년 전에 일 년 동안 근무하던 학교라 편안한 마음으로 왔지만, 환경이 바뀌니 낯설고, 적응하는 동안은 긴장이 됩니다. 오랜만에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며, 푸르른 양파와 보리를 보며 싱그러움을 느끼고, 시원스럽게 뻗은 백암산 대봉산 황석산 기백산 능선들을 바라보며, 푸른 들판과 마을을 감싸고도는 기상과 기운을 느낍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스마트폰으로 27년 전 교사 초년병 시절 써 놓은 글을 흔들리는 차 안에서 읽었습니다. “나는 이런 선생이 되고 싶습니다. 손해 보더라도 학생의 입장에 서는 선생이 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가장 우선순위는 학생이기 때문입니다. 내 잣대로 학생들을 판단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떻든지 학생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이해하고 싶습니다. 예의를 강조하는 선생이 되고 싶습니다. 예의를 지킬 때 정이 더 붙고, 예의를 어기면 있던 정마저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예의 바른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성실을 강조하는 선생이 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지지는 않으니까, 인내심을 가지고, 묵묵히 최선을 다한다면 모든 일이 잘 해결되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겸손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 싶습니다. 요즘은 자기 PR의 시대라고 하지만 그럴수록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언젠가는 겸손한 자가 높여지는 날이 올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꿈을 소중히 여기는 선생이 되고 싶습니다.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 만큼 조금씩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생 하나하나를 현재 상황에서 판단하지 않고, 학생들의 꿈을 보며, 그 꿈을 소중히 여기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선생이고 되고 싶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나의 제자들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나의 이런 가르침을 기억하며, 자기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여, 겸손하고 예의 바른 건강한 사회인으로 만나면 좋겠습니다.”글을 읽어 내려가며 윤동주 시인의 참회록이 떠올라, 가슴이 떨립니다.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윤동주의 참회록 중)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좋은 선생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지만, 교사 초년병 시절 다짐과 비교하면 나는 너무나 부끄럽게 살아온 것 같습니다. 때로는 핑계를 대거나 합리화하고 얄팍한 말들로 위기를 모면하며 살아온 적도 많은 것 같습니다. 시원스레 뻗은 황석산 기백산과 포근하게 마을을 감싸고 있는 백암산과 대봉산을 보며 남계 서원과 청계서원의 점필재 김종직 선생, 일두 정여창 선생 등 성현들을 생각해 보며 그 분들의 기상을 느낍니다. 심진동(尋眞洞)과 화림동(花林洞)에서 흘러내린 물로 적신 대지 위의 파릇파릇한 양파와 보리를 보며 푸른 꿈을 안고 사는 파릇파릇한 아이들을 생각해 봅니다. 새봄 새 학교에서 교사 초년병 시절의 다짐들을 다시 새깁니다. 그날의 다짐들을 다시 새기며 그날의 다짐들이 퇴색되지 않게 새로운 시작을 하려 합니다.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만 이십사 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슬픈 사람의 뒷모양이/거울 속에 나타나온다.윤동주 ‘참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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