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부터 시창작교실을 열었다. 진해장애인복지관에서 매주 금요일 오후 1시 30분부터 90분간의 강의로 진행된다. 시인으로 등단한 지도 벌써 10년이 훨씬 넘었지만, 아직도 필자에게는 시가 그렇게 만만한 문학 장르는 아니다. 그런데 시를 강의하게 되면서 시에 대한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어서 수강생들 보다 오히려 강의를 하는 내게 더 유익이 되는 것 같다.
수강생들은 대부분 장애를 가진 분들이며, 그들을 돕는 활동 보조인들과 가족들이다.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아픔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아픔이 예술로 승화될 때 그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마치 나무에 생기는 옹이처럼 상처가 아물면서 생기는 흉터와도 같은 것이 사람들에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세월이 지난 후에는 아름다운 무늬로 남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 새겨진 옹이들을 표현해 내는 것이 시라고 생각한다.
문학을 굳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그분들의 신체 특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뭇 조심스럽기만 했다. 차별이 아닌 배려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장애로 인해서 배움의 기회를 놓친 분들도 계셨고, 장애를 극복하느라 문학을 사치처럼 여기면서 살았을 지도 모르는 분들이기 때문에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했다.
청소년 시기에는 누구나 문학소년, 문학소녀가 아니었던가? 별을 보면서, 꽃을 보면서 느꼈던 그 감정들을 시로 표현해 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나의 강의 목적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시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시를 감상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시를 쓰는 것은 이른 바 시인들만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시는 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다. 물론 시라는 문학 장르에는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에는 운율이 있어야 한다. 흔히 글을 짧게 쓰면 시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아무리 짧은글이라도 운율이 없으면 시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긴 글이라도 글 속에 운율이 있으면 시가 된다. 운율을 가진 긴 글은 산문시(散文詩)라고 부른다. 보통 독자들이 대하는 글들은 크게 운문(韻文)과 산문(散文)으로 나뉜다. 운문은 일정한 운율(가락)을 가지고 있다. 운율이 있는 글을 시라고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산문이라 할지라도 운율이 있으면 그것 역시 시인 것이다. “딴딴딴딴 딴딴딴 딴딴딴 딴단”과 같이 일정한 박자가 있어서 흥얼흥얼 읊을 수 있는 글이 바로 시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시가 가지고 있는 첫 번째 조건인 운율만 갖추고 있다고 해서 다 시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시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은유적인(metaphorical) 표현이다. “개가 달을 보고 짖는다”는 문장은 평서문(平敍文)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달이 개를 보고 짖는다”라고 쓰면 은유적인 표현, 즉 메타포가 들어간 문장이므로 시의 요건을 충분하게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처럼 내 마음을 호수라고 표현할 수 있어야 비로소 시가 되는 것이다. 메타포를 더 폭 넓게 적용하면 풍자와 해학도 가능하다. 봉산탈춤의 대사나 품바(육자배기)의 대사들이 운율을 가진 풍자와 해학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운율도 있고 메타포도 있지만, 시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시는 우아하고 품위가 있어야 하며, 고결하고 정갈해야 한다. 그것이 시가 가지고 있는 품격이다. 그렇다고 표백 처리를 거친 백설탕처럼 깔끔하기만 하다고 해서 다 좋은 시는 아니다. 조금은 투박해 보여도 시인의 심성이 그대로 묻어나 있는 시가 가장 좋은 시라고 볼 수 있다.
가끔 노인대학이나 한글교실에서 어르신들이 쓰신 시라든지,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아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들이 쓴 시를 보면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엿볼 수 있다. 꾸밈이 없을지라도 그것 보다 더 예쁘고 아름다운 시는 없다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것이 바로 시(詩)의 순수성(純粹性)이다. 시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한 후에도 주의할 것이 있다. 시를 쓰다 보면 주절주절 하고 싶은 말들을 다 늘어놓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시는 가장 절제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시의 압축성(壓縮性)이다. 필요한 경우에는 조사(助詞)를 생략할 수도 있다. 서술어도 얼마든지 생략할 수 있다. 때로는 문장 전체를 다 생략해야 할 때도 있다. 하고 싶은 말을 시에 다 표현해 내려면 장황한 설명이 아닌 상징과 압축을 통한 심미적 표현(審美的 表現)으로만 가능하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중심으로 필자는 시(詩)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렸다. 시(詩)란 “메타포가 있는 운문(韻文)으로 우아하고 품위가 있는 네 박자 인생”이다. 시를 쓰려면 이와 같이 정확한 개념 정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시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적 이해(哲學的 理解)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개똥철학이어도 좋고, 심오한 개념 정리여도 좋다. ‘나는 시를 이렇게 생각한다’라는 자기만의 시에 대한 개념 정리가 선행되어야 올바른 시 쓰기를 할 수 있게 된다. 필자가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내렸던 시에 대한 정의는 이것이었다. “시(詩)는 시시해도 시(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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