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흐르고 흘러 바야흐로 3.1운동의 역사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3.1운동은 1919년 3월1일, 경성 파고다공원(현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비폭력 평화만세운동으로, 조선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한 독립운동이었다. 총 202만명의 국민들이 (참고로 당시 조선인 인구가 약 1300만~1700만명이었다. 한마디로 전체 인구의 최소 3%가 만세 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일제의 야욕에 맞서 7000여명이 죽고 1만50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4만5000여명이 체포되었다. 3·1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한국인 대부분은 유관순, 조금 넓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도 손병희, 한용운 등의 민족대표 33인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을 비판하겠다는 의도는 아니다. 모르는 것이 죄는 아니지 않는가. 이번 글의 논지는 이 3.1운동의 인지도와 더불어 34년 11개월 동안의 잊혀진 수십만 명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재조명하는, 그 중에서도 김용환이라는 한 호걸에 대해 말하겠다는 것이다. 네이버 검색창에 김용환이라는 이름을 입력해보면 50명이 넘는 인물 정보가 네이버 지식백과에 뜬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파락호 김용환에 관한 정보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단지 동명의 독립운동가 한 명이 있을 뿐, 그의 행적은 네이버 인물정보에 있지 않다. 그런데 구글 검색창에 김용환을 치면 맨 위쪽 오른편에 그의 사진과 함께 인물정보가 대문짝만하게 나와 있다. 즉, 한국인 김용환을 기억해주는 곳은 한국 회사인 네이버가 아니라 미국 회사인 구글인 것이다. 한국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를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우대해주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일평생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사람의 대우가 이러니, 무명 독립 운동가들의 지원 단절이나 사회적 무관심은 얼마나 더 크겠는가. 일제의 기록 말살로 인해 국가로부터 인정받지도 못하는, 수십만명의 독립운동가들! 물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운 것은 대가를 바라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나라를 지킨 사람들이 나라로부터 버림받는 현실이 너무나 씁쓸하기만 하다. 자, 그렇다면 이 잊혀진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인 김용환 선생은 어떤 행적을 우리에게 남기셨을까. 오늘 김용환 선생의 일생에 대해 파헤쳐보자. 김용환 선생은 의성김씨 학봉일파 (임진왜란 때 활약한 김성일의 종가)의 직계장손이었으며, 어릴 때부터 양반가의 자식으로 부를 누리며 살았다. 하지만 여느 친일 부호들과는 달리, 어릴 때부터 독립운동가인 할아버지 김흥락의 영향을 받아서 독립군이 되리라는 꿈을 가지고 1908년과 1911년에 이강년과 김상태 장군의 의병 휘하에서 싸워 여러 공적을 세웠다. 하지만 이 때문에 일본군에게 잡혀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김용환 선생은 더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1년에는 만주 독립군인 서로군정서의 자금 조달을 맡아 금전적인 지원을 통한 독립군의 활발한 무장투쟁에 일조하였다. 흔히 알고 있는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서로군정서와 같은 계통인 북로군정서이다. 하지만 숨기지도 않고 공개적으로 활동했기에 일제의 감시망에 걸리고 말았다. 그렇게 일본군에게 체포되어서 3번째 투옥되고 만다. 이후 출소한 김용환 선생은 계속 독립운동을 이어나간...것이 아니라 완전히 사람이 변하기 시작했다. 독립운동은 관심도 안 가지게 되고, 매일 같이 가문의 돈이랑 개인 재산을 죄다 노름판에 쏟아 붇고 다녔다. 게다가 인성도 시궁창 수준으로 나빠졌는데, 노름을 할 때 이기면 당연히 다 가져가고, 지면 순순히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갑자기 “새벽 몽둥이야!” 라는 말과 함께 바깥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고, 그 뒤에 판을 다 엎은 다음 모든 노름 돈을 챙기고 튀었다고 한다. 악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가족에게까지 손을 대기 시작한다. 딸이 시집갈 때 시가에서 장롱 마련하라고 준 돈까지 빼돌려(...) 버린 것. 덕분에 딸은 울면서 할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가져갔다고 한다. 근데 이것마저도 3년 뒤에 애를 못가진다고 강변에서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딸 결혼식에도 감감무소식이었다고 하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당시 집안사람들과 안동 인근 사람들은 모두 그의 이런 변화를 납득하기 어려워했으며 그를 집안 말아먹는 도박꾼, 파락호(가문 끝장낼 사람) 등의 별명으로 부르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헌데 더 가관인 것은 이 반응을 보고 반성이나 후회는 하나도 안하고 오히려 “집안에 학봉(김용환의 종가 시조 김성일의 호)과 난봉이라는 두 봉황(...)이 나왔으니 된 거 아니냐” 라는 패드립을 시전하며 적반하장의 끝을 보여주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사람이 왜 그리 변했냐’ 라는 반응과 도박에 미쳐서 온 재산을 다 쏟아붇고 가족까지 돈줄로만 바라본 인간 말종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지만.하지만 여기에는 엄청난 반전이 숨어 있었다. 도박으로 날린 줄만 알았던 그의 모든 재산은 사실 만주의 독립군에게 비밀리에 전달되고 있었던 것.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김용환 선생이 어릴 적, 김용환 선생의 사촌 김희락 장군이 일제와 싸우다 학봉종가로 도피했으나 일제에게 들켜 총살당하고, 김용환의 집안 식구들은 마당에 꿇어 앉혀져 모욕을 입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학봉종가의 물건들도 훔쳐가는 등 온갖 패악질을 부렸다. 당시 어린 김용환 선생은 이것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을 할 방법을 찾다가 노름이라는 수단을 발견한 것이다. 김용환 선생은 앞서 나온 새벽 몽둥이야 사건 등 여러 가지 깽판을 쳐서 열심히 군자금을 모았고, 그렇게 모으자마자 바로 만주 독립군에게 보내주었던 것이다. 사실 앞서 나온 노름판 행적에서 조금만 생각하면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다. 생각해 보아라, 이겨도 돈을 다 가져 가고, 져도 돈을 다 가져 가는데 재산이 바닥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지만 이 방법을 일본군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였고, 그렇게 김용환 선생의 작전은 완벽하게 성공한 것이다. 다만 끝까지 의심을 피하지는 못했는데, 일본군이 고문을 통해 받은 독립운동 관련 진술에서 김용환이 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을 지원한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주의 요망 인물로 올라 들킬 가능성도 차츰 높아져서 체포된 적도 있었다. 딸의 결혼 때 감감무소식이었던 것도 노름하러 튀어서 안 보인 것이 아니고 의심을 받아 형무소에 수감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연하게도 이 일에 대해 해명하지 않았다. 한 치의 타협도 허락하지 않았던 곧은 성품이 만들어낸 결과라 할 수 있겠다. 허나 일제의 감시는 더 심해져 독립운동을 지속하는데 어려움이 생기나 했는데 때마침 일본이 패망하여 체포되지 않고 끝까지 그 행적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신의 타이밍. 김용환 선생은 광복 직후인 이듬해 1946년, 조용히 눈을 감는다. 죽기 직전에 그의 진실을 알고 있던 친구 독립운동가 하중환 지사가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나?” 라고 물었으나 김용환 선생은 “선비로서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할 필요 없다.” 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죽는 순간까지 그는 사회적 명예도, 재산도 버린 채 딸에게는 원망받고, 사람들에게는 파락호라고 욕먹고 괄시받으며 살았으나 그는 끝까지 조국을 위해 헌신하였다.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아닌 조국을 먼저 생각한 인물, 김용환. 그야말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라 하겠다. 작년 여름 인기리에 방영된 미스터 션샤인의 서브 주인공인 김희성의 모티브로 추정되는 분이 바로 김용환 선생이다. 양쪽 모두 부잣집에서 태어나 부를 버리고 목숨을 걸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으니 어찌보면 역사의 수레바퀴의 커다란 동질감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이 글을 적게 된 이유를 말하며 이 역사의 종장을 찍도록 하겠다. “혁혁한 전과를 세웠음에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잊혀진 한 인물의 짧지만 굵은 삶을 보고 기억해주시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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