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초기부터 국가고시 과목으로 문·무과와 함께 잡과(雜科, 기타)가 있었으며 잡과 속에 역과(譯科, 지금의 외무부)와 의과(醫科, 지금의 의학), 율과(律科, 지금의 형법), 음양과(陰陽科, 지금의 천문학, 풍수지리학, 사주명리학)를 두어 기술관을 등용하였다. 여기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음양과陰陽科에 천문학, 지리학, 명과학이 배속된 것으로, 풍수지리학과 사주명리학이 국 가에서도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던 제도권 안의 학문이라는 것이다. 잡과는 3년마다 시행하는 식년시式年試와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부정기적으로 보던 증광시增廣試가 있었으며, 1차 시험인 초시初試와 2차 시험인 복시覆試의 2단계 시험을 거쳐 합격자에게는 합격증서인 백패白牌를 주었다. 잡과 중 음양과陰陽科의 선발인원은 천문학이 초시 10명, 복시 5명, 지리학·명과학은 초시 각 4명, 복시에서 각 2명을 뽑았다. 1등 합격자는 종8품, 2등은 정9품, 3등은 종9품 품계를 주어 관상감의 권지權知로 분속시켰다가, 자리가 나면 실직實職을 주었다. 응시자격은 관상감에서 음양학을 일정기간 공부한 생도들에게 주어졌다. 관상감에는 천문학 20명, 지리학 15명, 명과학 10명의 생도가 있었는데 거의 사족士族이 아닌 양가良家의 자제나 양반의 서얼들이었다. 여기서 조선시대 관상감의 업무는 세 가지로서 천문학에서는 천체에 대한 관측과 책력을 만드는 일을 담당하였고, 지리학에서는 묘자리나 집자리를 잡는 일을 하였고, 명과학에서는 길흉을 판단하여 국가 행사의 날짜를 잡았다. 명과학命課學에서는 정직正職의 명과학훈도(정9품) 2명을 두어, 운명 ·길흉 등에 관한 학문을 가르쳤다. 《경국대전》에는 명과학생도를 10명으로 정하였는데 명과맹命課盲이 소속되어 교육받은 것으로 미루어 천인賤人도 있었던 것 같다. 학업을 마친 뒤 명과학 시험을 통하여 관상감 참외參外의 체아직遞兒職을 제수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명과학고시에 합격한 사람은 궁중의 택일, 혼인, 제삿날 등을 잡을 때 공무원처럼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반면 지리학 고시에 합격한 사람은 지관(地官, 땅을 보는 관리)으로서 매월 녹봉 먹는 관리가 아니라 증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이론과 실전을 쌓아감으로써 왕릉을 선정할 필요가 있을 때만 임명되는 임시직이었다. 지관은 한문에 능통해야 했고, 또 선배 풍수사를 따라 명산대천을 답사해야 했으므로 생업에 종사하는 평민이나 글을 모르는 무당이나 점쟁이는 지관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의 풍수사는 대개 승려였거나 양반 혹은 중인 계층에서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 담당했고, 그들의 신분이 대체로 양반에 속했기 때문에 ‘지관 양반’이라 불렸다. 그렇게 현장의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가 이론과 현장적 실력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돌게 되면 임금이나 왕비, 대궐터의 선정이 필요할 때 그 당시의 뛰어난 풍수사를 선발하였다. 결론적으로 나라에서 인정하는 고시과목인 잡과에서 역과는 지금의 통역관 또는 외교관이며, 의과는 지금의 의사, 율과는 지금의 판검사로서 현대에는 오히려 잡과에 속했던 조선시대보다 훨씬 더 인정받는 직업으로 대우를 받고 있지만 오직 음양과만이, 특히 국립천문대나 기상청과 관련된 천문학을 제외한 풍수지리학과 사주명리학만이 잡술로서 양지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음지에서만 대우받아 왔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다행히 현재 원광디지털대학교에서 최초로 동양학과를 개설해 음양과陰陽科의 학문들을 다시 재조명하면서 학술적인 체계를 구축해 가며 후학양성에 힘쓰는 모습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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