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양(咸陽) 사람이다. 1910년 경남 진주에서 한문교사로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1913년에는 경남일보 주필로 계몽운동에 힘썼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동년 4월2일부터 6월20일경까지 함양군 지곡면 정치리에서 유생 박재룡(朴在龍)과 같이 조선독립선언서·독립충고문·조선독립가·조선독립경포서·조선독립책선문(朝鮮獨立責善文) 등을 제작하여 배포하다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1919년 8월1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에 실린 추범(秋帆) 권도용(權道溶) 선생에 대한 공적 내용이다. 그러나 이는 실천적 유학자로서, 또 언론인으로서 국민 계몽운동과 조국의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그의 활약에 비하면 너무 초라한 공적서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본지는 추범 권도용 선생의 손자인 권진현(사진·82·함양읍 교산리) 전 함양교육장을 만나 추범의 독립운동과 후손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어 부끄럽다”는 권 교육장은 할아버지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리며 독립유공자 후손으로서 3.1운동 100주년의 감회에 젖었다. 권도용 선생은 안동 권씨 33대손으로 조부 때까지 대대로 산청군 단성에서 일가를 이루고 살다 부친(재모:在模)이 병곡면 도천마을 진주 하씨 집안의 딸과 결혼하면서 함양에 정착했다. 추범은 1877년 도천마을에서 4형제의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에 뛰어나 과거시험을 준비하다 어지러운 정세에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한문공부에 매진했다.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독립호소문을 보내 옥고를 치렀던 면우 곽종석(郭鍾錫)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권 교육장은 “할아버지는 당시 총, 칼이 아닌 붓으로 일제와 맞서 여러 차례 구금과 석방을 반복하며 옥고를 치르면서도 끝까지 필봉(筆鋒)을 꺾지 않으셨던 분이다”며 “면암 최익현 선생이나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 또 중국 장개석 총통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거물급 인사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국권회복을 위해 힘썼다”고 했다. 이같은 사실은 함양문화원에서 발행한 <함양역사인물록>과 <함양 항일투사록>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권 교육장은 “서신첩이나 문집 등 할아버지의 유품이 제대로 보존되지 않아 아쉬움이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 추범께서 옥중 생활을 일기처럼 쓴 구유록(拘幽錄)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구유록에는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된 사람의 이름이 여러 명 등장한다. 이들 중 증빙자료가 없어 그동안 미등록 유공자로 남아있던 몇몇 분이 구유록을 근거로 독립유공자에 등록됐다”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추범은 지역유림들을 규합하기 위한 경남유림대회 취지문을 직접 작성하는가하면 1922년 2월 안의면 교복동에서 한일합방을 반대한다는 문서를 제작 배포하다 검거돼 보안법 위반으로 또다시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는 “할아버지께서는 오랫동안 산청 문산재에서 후학들을 양성했다”며 “지곡, 안의 향교 등 가까운 곳에 계실 때도 1년에 한두번 설이나 추석 명절 외에는 집에 오시는 일이 거의 없었고, 집에 오셔도 오래 머물지 않으셨다”고 했다. 어린 권 교육장의 눈에 비친 할아버지 추범은 예의범절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무척 엄하신 분이셨다. “앉은 자세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고 했다. “말년에 2년 정도 고향 도천에서 생활하셨을 때도 매일 저녁 9시면 잠자리에 들어 새벽 4시면 기침하셨다. 하루도 어기는 일이 없었고 아버지는 매일아침 문안인사를 올렸다”고 했다. “외아들인 아버지도 동아일보와 부산일보 등에서 기자생활을 하다 6.25이후 중등교사로 임용돼 하동 진교중학교를 거처 함양중학교에서 정년퇴임했다. ‘함양군민가’와 함양지역 20여개 학교 교가를 지은 권병탁 씨가 추범의 외아들이자 권 교육장의 부친이다. 진주사범대를 졸업한 권 교육장은 함양초등학교에 초임 교사로 발령받아 지난 2001년 함양교육장으로 정년퇴임하기까지 42년여를 교직에 몸담으면서 대부분 함양에서 교직생활을 했다. 4남2녀 중 큰형님을 비롯한 4명의 형제가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87세를 일기로 타계한 권도용 선생의 묘는 병곡면 도천마을 선산 양지바른 곳에 모셔져 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