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라는 장례葬禮에 관한 일본 영화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일 뿐이다.”라는 대사가 기억이 난다. 기독교문학의 대표작인 <천로역정>에서는 “죽음은 감옥에서 나와 궁궐로 들어가는 통로일 뿐, 폭풍의 바다에서 헤어 나와 안식의 항구로 들어가는 것”이라 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죽음을, 그림자(육체적, 色)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데아(영적, 空)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과의례로 보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그렇게 의연하게 죽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죽음의 본질이란 단지 이동에 불과하며 지금의 세계로부터 다른 차원의 세계(본래의 세계)로 옮겨가는 것일 뿐이다. 플라톤은 “육체를 떠나면 영혼은 진실을 명확히 볼 수가 있다. 전보다 더욱 순수해져서 전에 알았던 순수한 생각들을 기억할 수가 있다.”라고 말했다. 김동수 시인은 “죽음은 궁극적으로 소멸이 아니라 그 결과에 따라 윤회輪廻를 거듭하고 있다는 결론이다. 만해도 <임의 침묵>에서 ‘이별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라고 했듯이, 그러기에 죽음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며, ‘절망’이 아니고 ‘희망’인 셈이다.”라고 말했다. <티벳 사자의 서>에서는 “사람이 죽어 육신을 떠나면 다시 태어나기 전까지 49일 동안 바르도(中陰)라고 불리는 중간 상태에 머물게 된다. 이때 그 의식체는 생전에 그를 지배하던 저차원적이고 거친 욕망 쪽으로 달려가려는 카르마의 속성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더 강한 힘을 가진 ‘바른 지식’의 수련을 쌓으면 그 의식체의 한 부분이 붓다의 경지를 성취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사자는 자신의 저차원적인 동물적 성질에서 투영되어 나오는 공포의 유령들에 사로잡히는 대신, 죽음과 환생 사이의 그 중간 상태를 지나 바르도가 아닌 즐거운 세계(극락)에 가게 된다.”라고 설명한다. 우리 조상들은 ‘죽었다’의 표현을 ‘돌아가셨다’라고 말을 한다. 이 말은 지금 육체로서 잠시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죽음을 통해 우리가 원래 있어왔던 저 세계로 다시 돌아간다는 뜻으로, 우리 조상들은 영혼의 진정한 고향이 육체를 가지고 사는 이 지구라는 윤회의 장소가 아니라 다른 차원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영혼의 고향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아니라 북두칠성北斗七星이 있는 곳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어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통장례에서 관속에 넣는 칠성판도 망자가 가는 저승을 북두칠성으로 보는데서 유래했으며, 지금으로 표현하면 원래의 본 고향으로 잘 가도록 안내하는 표지판이라 보면 되겠다. 동양의 천문분야인 사주명리학을 공부하면서 이번 생의 운명에 관한 많은 의문점을 갖는 것만큼 생의 이후인 죽음이라는 것에도 강렬한 의문들이 생겨 결국 많은 책과 자료들을 접하게 되었고, 필자 나름대로의 죽음과 윤회에 대한 관점이 형성되었다. 여기에 열거하는 내용은 오직 필자 개인의 관점이므로 혹시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기를 바란다. 죽음이란 영원불멸한 삶 속에서 하나의 현실이 변화된 것일 뿐이며, 새로운 육체로 태어나게 되면 망각의 장벽이 과거 인생의 기억을 막아주기 때문에 우리는 주저 없이 발전해 나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육체로 태어나면 영혼은 그 육체적 성격(타고난 사주팔자)과 합쳐져서 나를 이루며, 지구로 오는 영혼들은 세상이란 무대 위에 오른 마스크를 쓴 배우인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 대부분은 연극이 시작 되었음에도 극이 끝날 때까지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인데, 매 인생마다 다양한 망각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삶 자체가 잠시 연극을 하기 위해 무대에 올라가 이번 생에 필요한 배역에 충실하다가 무대를 떠나면 본래의 나(眞我)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무대를 내려오면 더 이상 배우가 아니다. 간혹 연극이 끝나고 무대를 내려와서도 여전히 배우로 착각하고 가야할 본원本源으로 가지 못하고 헤매고 남아 있는 영혼들이 있지만 결국은 다 돌아가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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